文明の憂鬱 (新潮文庫) (文庫)
平野 啓一郞 / 新潮社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두 편의 소설을 출간한 뒤 2년간 잡지에 연제된 글들이 모여진 책이며, 히라노 게이치로가 바라본 일본 사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스물네살 그 당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본 사회의 모습과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사회의 모습들, 자취생활을 병행하면서 20대이고, 직업으로서 소설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어간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사유가 담겨져 있다.


소설 <장송>을 읽고 난 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가 쓴 소설과 에세이들, 그에게 왜 천재 작가가라고 꼬리표가 붙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책은 그의 소설가 입문 초기, 20년전 일본 사회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기 딱 좋은 에세이였다. 지금 20대 초반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문명의 우울>을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 내 머리 속에 1970년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많은 것들이 필터링 된 채 나에게 익숙한 것들만 받아들이듯 말이다.


첫번째 이야기는 아이보였다. 로봇 장난감 아이보는 소니가 만든 획기적인 로봇 애완동물이다. 이 로봇 장남감이 개발된 이후 혼다에서 개발된 이족 보행 로봇 아시모(ASIMO)가 개발되었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 삶이 바뀌게 된 시작이며, 인공지능과 제4차 산업 혁명의 시작이 되었다. 저자는 그 당시 자신이 바라본 문명이 가져다 주는 우울감을 생각했으며,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불안을 예측했다는 사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가지는 욕망은 문명을 잉태했으며, 인간은 그 문명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과 매스 미디어가 그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히라노 게이치로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공 애완동물이 살아있는 생물 그 자체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소유하면서부터 비로소 애정의 대상이 되는 애완동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혹 창조에 대한 우리 무의식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우리는 생물 그자체를 모방해 로봇 동물을 만들고,애완동물에게 쏟는 것보다 더 보편적인 애정을 로봇 동물에게 쏟게 될지도 모른다. (p10)


매스미디어가 못마땅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가끔,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정보의 수신자와 송신자 모두를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유입된 정보에 미치는 매체의 영향에 대해 더욱 명확한 의식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 언론은 이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신자인 우리도 매스미디어와 좀 더 냉정하고 적합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p19)


매스미디어와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이제 불가능해졌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TV 를 보지 않고,신문을 보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럴 경우 우리는 사회와 동떨어지게 되고, 멀어져 간다. 거리를 유지한다는 걸 반기지 않는 매스미디어의 생산자와 그들과 유착관계를 형성하는 이들은 우리의 삶 깊숙히 파고 들어간다. 정치인들은 매스미디어를 활용하고, 기업도 그것을 활용한다. 일반 자영업자도 매스미디어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많은 걸 변화시키고 있다. 책에는 미국에서 일어난 9.11 사태에 대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생각이 엿보인다. 수많은 인명 피해자가 나타난 그 현장을 매스미디어가 고스란히 사실적으로 현장을 전달하지 않고 잇으며, 왜곡하고, 반복 재생함으로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무덤덤해지면서, 그것을 영화처럼 받아들인다. 이런 모습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 사고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잇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지마느 우리는 그것에 노출되면서, 그 잔인함에 대해 무덤덤 해져가고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이는 그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 책은 랭보가 16살 때 쓴 책이며, 소설가로서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술가로서 소설가로서 살아간다는 건, 누군가 롤모델이 존재하며, 그들을 따라가게 된다. 그 대상이 히라노 게이치로에겐 아르튀르 랭보였으며, <금각사>,<가면의 고백> 을 쓴 미시마 유키오였다.


과학에 대한 신앙은 오늘날에 와서 퇴색되기는 커녕 더욱 강해진 듯하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믿는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p33)


낙서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존재를 그 장소에 새기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때로 낙서가 치누들끼리만 통하는 연락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그러한 특성을 살렸기 때문이다. (p43)


히라노 게이치로는 낙서에 대해서 일본인은 낙서를 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낙서를 하지 않는 일본인의 해위는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라고 말한다. 그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인처럼 낙서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낙서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 뿐 아니라 해외 각국의 여행지에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한글로 쓰여진 낙서가 현존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본인과 한국인은 뭔가 동질감을 느끼면서 이질감도 함께 가진다.


지진은 이를 테면 갑작스러운 허무의 습격이다. 그것은 매우 직접적인 파괴를 위한 파괴이며, 생각을 허락치 않는 찰나적인 현상이다. 지속되는 재해가 인간들로 하여금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한다면, 지진은 그런 여유조차 주려고 하지 않는다. 화산의 분화가 현상으로 볼 때 얼핏 지진과 같으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지진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지리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것이 지속적이라는 것, 나아가서는 상징의 차원에서 물과 동등한 의의를 가지는 불이 파괴의 실태로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p74)


히라노 게이치로는 로봇을 좋아한다. 그리고 때로는 주변에 보이는 걸 유심히 관찰하고 그 안에서 본질을 찾아 나간다. 그래서인지 사회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혐오감도 보여진다. 비행기와 통조림, 고질라, 구제역에 대한 혐오, 매쓰미디어에 대한 혐오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고베 대지진을 가까운 곳에서 마주해야 했던 히라노 게이치로가 바라본 허무함과 두려움은 무엇인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순식간에 모든 게 파괴되고, 준비되어짐이 없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지진이며, 가족의 붕괴의 이유가 된다. 슬퍼할 겨를도, 여유조차 지진앞에선 무기력해진다.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 작가로 살아진다는 건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바라본 문명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풍요를 가져다 주면서 때로는 사람을 옭아매고 ,집착을 강요당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했던 직업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동경하지만, 실제 삶으로서의 소설가는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마주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그 불안함이 그의 새로운 작품을 잉태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으며, 천재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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