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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 2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4년전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었을까, 1600페이지 두꺼운 책을 선뜻 읽어야지 하기엔 상당히 버거웠을 것 같다. 지금은 궁금하면 읽게 되고,
읽으면 그 안에서 작가의 다양한 작품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베 미유키,히가시노 게이코에
이어서 일본 천재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를 알 수 있게 되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수 밖에 없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하고, 1권을 읽을 때만 하여도 책 제목 장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갸늠할 수가
없었다. 쇼팽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분명한 데 책 제목과 연결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장송 2권을 읽으면서 비로서 장송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쇼팽의 '장송 행진곡’ (Piano Sonata no. 2 in B flat minor, “Funeral
March”) 이며, 이 소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예술 세계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쇼팽의
친구 외젠 들라르쿠아의 이야기, 쇼팽의 연인 조르즈 상드의 이야기가 바로 소설 <장송>의 전체 이야기이다.
그는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병고라는 것의 절망적인 평범함에 대한 확고한 자각을 얻었다. 병고란 어떤
사명적인 서명도 허용하지 않는 진부한 괴로움이다. 그곳에는 어떤 독창성의 여지도 없다. 그저 일정한 고통이 시간과 장소를 넘어
다양한 인간의 육체에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증상이 있고 병명이 부여되고 그리하여 의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된 것은 결코 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재능도 부도 거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p107)
쇼팽의 삶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게 된다. 조르주 상드와 그의 자녀 솔랑주, 두 사람 사이에 엮이면서 쇼팽은 조르주 상드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상드와 솔랑주 사이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상드 부인은 양녀 오귀스틴 브로에게 공을 들이게 되었다. 자신보다
양녀를 먼저 생각하는 조르주 상드의 모습과 솔랑주를 바라보는 쇼팽의 시선 솔랑주에게 있어서 쇼팽은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하지만 솔랑주는 쇼팽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나 처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신의 처지와 안위만 걱정하는
철부지였다. 어머니와 관계 악화, 오귀스틴의 결혼식을 챙겨주는 조르주 상드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쇼팽의
삶은 상드 부인과 헤어지면서 파리에서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영국으로 옮겨가면서 그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으며, 반면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를 거의 개최하지 않았다. 쇼팽의 내면속에 들어있는 천재적 예술가로서의 삶,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고, 쇼팽의 삶 자체는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쇼팽은
연주회 혐오증을 가진 피아니스트라 불리게 된다. 그런 쇼팽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쇼팽 옆에서 쇼팽를 위로해
주고, 쇼팽의 친구로서의 삶을 대신하게 해 주었다. 들라르쿠아는 고향 폴란드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쇼팽, 가족을 보고
싶어하는 쇼팽의 마음은 대신할 수 없었다. 쇼팽의 가족이 머물러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는 러시아의 지배에 있었으며, 쇼팽은 자신의 세
누이 루드비카, 이자벨라, 에밀리아 중 막내 에밀리나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자신의 음악적 영감을 제공해 준 14살에 세상을
떠난 에밀리나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은 이 세계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가면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단지 그것을 원망하지 않게 된 것뿐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자연의 본모습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 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차츰 엷어져 간다. 가면을 벗겨낸 그
너머에 자신이 알 수 없는 진짜 자연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은 현재 목도하는 이 자연에 항상 배반당한다. 늙음은
그러한 환멸을 천천히 씻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낸 자연의 외관에 어느새 만족하는
법을 배워버린 것이 아니다. 어느 때인가 그렇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은 분명 자연 그 자체와,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여 다시 거기에 걸쳐 놓은 환영과의 사이에 하나의 화해를 발견해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거기에 있는
자연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한, 자연 그 자체에게서 받은 어떤 용서 같은 것, 세월은 자신을 그에 걸맞는 존재로 조금씩
바꾸어갔다. 그리고 자연은 마침내 그것을 인정했는지도 모른다. 그 용서야말로 화가인 자신에게는 더할 수 없는 은총이
아닐까.(p660)
들라르쿠아가 말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불가분한 관계이다. 삶에 대해 말하면서, 죽음에
대해 정의한다. 나이듦은 죽음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쇼팽이 바라본 죽음은 들라르쿠아가 바라본 죽음과 동일시되어지고 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는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런지, 자연 속에서 인간만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건
어쩌면, 삶의 끈을 끝까지 붙잡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간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내려 놓을 줄 알게 되었다. 쇼팽은 1849년 솔랑주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달하였으며, 솔랑주는 쇼팽이 사랑했던 연인이자 자신이
혐오햤던 어머니 조르주 상드를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많은 이들이 슬퍼하였으며, 그동안 금기시해
왔던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다. 삶의 끝에서 결핵이라는 불치병에 맞서야 했던 피아니스트이자 예술인, 그 시대는 음악가를 예술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쇼팽에 이르러서야 음악은 예술의 장르로 인정될 수 있게 된다.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을 필사해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