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
피터 멘델선드 지음, 김진원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를 세번 이상 보았다.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원작을 읽었으며, 실제 영화와는 차이가 많았다. 물론 그 영화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기억에 오래 오래 남기고 싶어서 이젠 원작을 읽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보지 않고, 원작을 먼저 읽었다면 어땠을까, 소설 속의 이야기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앤디 삭스를 앤 헤서웨이와 연결짓지 못했을 것이고, 미란다를 메릴 스트립과 연결하면서 상상하지 못했을 건 당연지사이다. 그것을 소설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읽고 난 뒤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원작을 먼저 읽은 케이스였다. 소설 속 등장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 나름대로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가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는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사유하고 있다. 우리는 책을 읽어 가면서 그 안에 놓여진 텍스트를 이미지화 하게 된다. 영화에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소설에서는 반드시 구현하고 설명해야 한다. 작가의 시점에서 작가가 바라 본 설정들을 통해 우리는 텍스트 안에서 상상하게 되고, 상상은 내 머리 속에서 내 마음과 연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가지 표상과 기호에 대해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저자는 그것을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우리가 텍스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사유하도록 만들어 나간다. 즉 일반적인 나열식 텍스트는 평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흐릿한 가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텍스트에 줄을 긋거나 사선의 도형을 위 아래로 채워 나가면 그 텍스트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텍스트를 화살표에 가둔다면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자는 텍스트를 화살표에 가두고 세로로 세워 놓으면서 우리들의 반응을 엿보고 있다. 분노의 의미가 채워져 있는 텍스트가 화살표에 가두어지고 꺼꾸로 세워진 형태를 보일 때 우리는 그걸 읽는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그럼으로서 그 텍스트에 대한 분노의 이미지를 증폭 시킬 수 있다.


내 생각에 상상력은 시력과 비슷하다. 사람이라면 거의 지니고 있는 능력이란 말이다. 물론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서 다 똑같이 예리하게 보는 건 아니지만.(p204)

작가가 인물이나 장소에 대해 그 모습을 빈틈없이 시시콜콜하게 묘사하면 독자가 그리는 그림은 풍성해지지 않을 것이다. 또렷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가 펼쳐놓은 세세한 묘사는 그 정도에 따라 독자가 체험할 독서의 질을 좌우한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 속에서 나열되는 형용사는 미려하게 문장을 다듬는 힘이 있을지언정 맥락을 잇는 힘은 부족하다. (p161)


우리는 분명 상상을 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장갑을 어디에 뒀더라? 머릿 속으로 찾으려고 뒤진 방은 관념이다. 단순한 도식에 불과하다. 나는 그 방을 장갑이 있을 법한 여러 장소로만 이루어진 세트라고 생각한다. (p250)


책을 읽으면서 하는 하는 상상은 대부분 시각적인 자유 연상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작가가 쓴 내용에 매여 있지 않다. (우리느 책을 읽는 동안 몽사에 잠긴다.) (p312)


벅 멀리건을 서술한 표현을 빌려 우리는 실제로 누구든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벅 멀리건을 정의하는 말은 '당당하고 통통한'과 같이 벅 멀리건을 소개하는 형용사이다. 그런데 그림에서는 다르다. 나에게는 그 표현이 어떤 유형을 가리키는 기호가 된다.(p386)


작가는 경험을 감독하는 사람이다. 세계를 매운 소음을 거르고 그 속에서 가장 순수한 신호를 잡아낸다. 무질서 속에서 이야기를 짠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책이라는 형태로 꾸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책 읽는 경험을 주관한다. 하지만 작가가 독자한테 제공하는 정보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작가가 아무리 부지런하게 거르고 빈틈없이 재현하더라도 독자는 머릿속으로 분석하고 검토하며 분류하는 이미 정해진 임무를 그대로 이어간다. (p420)


작가는 글을 쓸 때 환원하고 독자는 책을 읽을 때 환원한다. 우리 뇌는 환원하고 대체하고 상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럴 듯한 신빙성은 가짜 우상일 뿐 아니라 다다를 수 없는 고지다. 그래서 우리는 환원한다.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환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파악한다.인간이라서 그렇게 할 수 있다.(p433)


우리는 작가가 설정해 놓은 이야기에 갇히게 된다. 작가의 세세한 관찰력은 독자에게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모든 작가가 그렇게 친절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중요한 것을 감춤으로서 독자는 그 안에서 자기의 생각과 상상력이 들어가게 되고,우리는 모두가 몽상가가 되어간다. 나의 경험이 오롯이 들어가게 되고, 소설 속 텍스트 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나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소설을 읽는 시점과, 어른이 소설을 읽는 시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경험의 차이, 소설을 읽는 백그라운드의 차이는 소설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어린이 소설과 동화책이 성인이 되어서 재미가 반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잇다. 저자는 아트 디렉터이며, 책의 표지를 재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의 컨텐츠에 따라 표지를 결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제임스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대체로 우리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읽아 나간다. 저자는 율리시스나  피네간의 경야와 같은 어려운 책을 읽을 땐 형용사와 부사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무언가 엇박자되어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