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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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고구려, 세나라중 우리는 신라에 대해 찬란한 역사라 부른다. 신라가 찬란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건 그들의 문화제가 현존하고 있는 유물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유물들은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한때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에 현존하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백제의 유산이다.


이 책의 맨앞에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백제의 송산리 고분군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본인 교사 가루베 지온이 공주에 교사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백제의 문화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 총독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공주 곳곳에 남아있는 백제 고분들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가루베 지온은 700여기의 백제 고분들을 답사하였고 , 그의 발자국이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며, 백제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 있으며, 그 사적지는 고고학 최대의 발굴이라 부르는 백제 25대 왕 무열왕의 무덤 무령왕릉이다. 이 무덤은 그가 죽은 이듬해 1971년 6월에 배수로 공사를 하던 도중에 나타났으며, 저자는 이 무덤이 발굴된 그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고 있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그 당시 언론들은 들썩 거렸다. 한국일보 특종으로 문화재 발견 소식이 타전되었으며, 언론 뿐 아니라, 공주군민들, 문화재 관계자들 또한 큰 관심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것이 무령왕릉 졸속 발굴의 원인이 된다. 문화재 발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이들이 문화재 발굴에 참여함으로서, 무령왕릉 문화재들은 훼손되었다. 무령왕릉 입구에 무덤을 지키는 영험한 동물 진묘수가 사람의 발자국으로 인해 훼손되었고, 문화재는 하루사이에 감자, 고구마 캐듯 쓸어 담았다. 1차 발굴로 인해서 문화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료와 흔적들을 제대로 얻지 못했던 것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문화재는 그렇게 쓸어 담아도 되는 줄 알았다고 변명하고 있었다. 꽃삽을 활용해 쌀포대에 쓸어 담았던 그들의 행동들, 실제 문화재 발굴에 참여했던 29살 지건길, 30살 조유진은 문화재 훼손의 주요 책임자였다. 저자는 이렇게 졸속 발굴하게 된 책임을 청와대에 있다고 보고 있다. 무지몽매했던 권력자는 문화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목적 달성에 무령왕릉을 이용하려 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또한 문화재 발굴을 재대로 할 줄 알았던 고고학자 김원룡은 그곳에 없었다.


무령왕릉 훼손은 1971년 7월이 처음이 아니다. 이후 문화재는 공부 박물관에 이관되었지만, 무령왕릉은 대중들에게 다시 공개되었으며, 2차 훼손이 일어나게 된다. 관광지로서 수익 창출을 위한 공주시의 이해관계, 또다른 특종을 기대했던 언론, 무령왕릉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청와대..그들은 그렇게 무령왕릉을 이용하였고, 훼손하게 된다. 그리고 무령왕릉은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영구 폐쇄 조치 되었다.


우리는 항상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성찰은 없다. 무령왕릉 발굴단은 도굴군보다 더 못한 졸속 발굴을 진행하였고, 그들은 구경꾼들이 무령왕릉 주변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변명한다. 그 당시 문화재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본인 가루베 지온도 세상을 따니 버렸다. 살아있는 이들은 백제의 소중한 문화재 무령왕릉의 남아있는 흔적과 그 안에 숨어있는 고고학적 증거, 그들은 졸속 발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알고 싶었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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