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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정재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8월
평점 :
1만년전, 일본과 한반도는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서로 아웅다웅 하지만 과거엔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그들은 서로 교류하고 있다. 이럽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한국,저자는 일본의 교토와 한국의 서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도쿄가 아닌 교토일까, 또한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경주가 아닌 서울일까 궁금하였다. 일본의 교토가 신라의 경주처럼 천년고도로서 한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며, 서울보다는 경주가 더 적합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두 나라의 수도는 서울과 도쿄 이기 때문에 비교하기에 적합할 수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통념에 벗어나 있다. 여기서 500년전 과거로 돌아가면 한반도와 일본 동시대에 현존했던 수도는 교토와 경주가 아닌, 도쿄와 한양이 아닌, 교토와 서울이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수도였다. 교토는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까지 1000년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그것이 저자가 교토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역사기행이며, 교토의 1만년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연결짓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왕권이 교체되면, 난민이 발생하거나 유민이 생겨난다. 그들은 한반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며, 일본 열도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일본은 자기가 가진 문화에 대한 부족함을 알고 있었으며, 백제와 발해가 멸망하였을때 그들을 흡수하는 기회로 삼았고, 일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받아들였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이 가진 결핍이며,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런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우리에게 유리한 역사 사관을 들이밀고 있지만, 그들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은 엄연히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과거 칭키스칸이 전세계를 호령했던 것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길목을 막고 있는 한반도, 해양국가로서의 한계는 그들이 꿈꾸었던 야망을 번번히 무산시켰으며, 언제나 전쟁이후 스스로 그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임진왜란에 대해 이순신과 선조, 징비록을 쓴 류성룡,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승병과 농민들..우리가 알고 있는 건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국난을 어떻게 극복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모습과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의 모습이다. 임진왜란은 교토에서 시작되었으며, 교토에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이묘를 교토로 불러들였다. 그건 임진왜란을 일으켜 다이묘에게 나눠 주기 위함이며, 여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운이 좋게도 빠지게 된다. 교토라는 한정된 공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이묘가 모두 들어오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운명이 엇갈렸으며, 임진왜란이 일본에 의한 승리로 정리되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으며, 도요토미 가문은 몰락하고,그 빈틈을 도요토미 이에야스가 차지하며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 담겨진 임진왜란의 뒷이야기이며, 그안에 천년고도 일본의 수도 교토가 있다.
교토의 운명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수도가 도쿄로 옮겨갔으며,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 문화 경제가 다시 재편되었다. 그동안 교토에서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천왕이 도쿄로 이사함으로서 교토의 상징성이 위축되었으며,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교토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으며, 일본의 문화와 교육,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책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이라는 곳.그곳에는 조선인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죽은 조선인 10만명의 귀무덤 이총이 현존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지금 아베 정권의 뒷이야기와, 일본 유학길에 조선인의 이야기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