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소재원 지음 / 작가와비평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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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내가 사는 곳에 죽령터널이 개통되었다.왕복 4.7km 거리의 죽령 터널,개통할 당시 나는 그곳을 달렸고 완주메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죽령터널의 개통으로 서울로 가야할 때 청량리로 가는 기차가 아닌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는 버스로 바뀌었으며, 시간은 2시간 30분으로 줄어들었다. 명절이면 소백산을 넘어가야 했던 불편함,희방사에서 양쪽으로 반짝반짝 단양에서 풍기 초입까지 15km 거리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던 그 추억은 사라져 버렸으며,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빨라지고 편리해지게 된다. 여기서 편리함이라는 개념은 안전함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편리함을 취하면서 안전함이라는 또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 안전함이 무너져 내리면 그것을 버리고 불편함으로 회귀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서울에 갈때면 지나가는 죽령 터널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곳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터널>에는 안전하다 믿었던 터널이 무너져 내려 버렸다. 아이의 생일을 위해 터널을 지나가던 도중 터널이 무너져 내렸으며, 아이와 아내와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언론은 이정수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 터널 붕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져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정수가 살아나느냐 마느냐가 아닌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우리는 정의를 외치지만 그 정의라는 깊숙히 감추어진 곳에는 경제가 있고 소비가 있다..그 소비라는 본질이 사라지면 정의 또한 사라지게 된다. 이정수가 터널 속에 갇힘으로서 언론은 동전론과 책임론을 내세워 소비하고 있으며, 이정수의 아내 미진 또한 소비하고 있다. 여기서 정수의 아내이자 수진의 엄마였던 미진이 남편이 갇힌 것에 대해 따지고 항의 할 수 있었던 그 이유 또한 소비라는 개념이 숨어 있기 때문이며, 보험사와 119,112, 누군가 소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기 떄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였다. 언론과 정부, 터널 붕괴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비라는 것이 언젠가는 멈출 거라 생각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것, 사람들이 터널 붕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 그들의 소비도 멈추게 된다. 여기서 터널 붕괴를 위해 일하던 누군가가 사고로 인하여 죽게 되면 사람들은 이정수를 반드시 구해야 하느냐,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이정수의 죽음과 그를 살리기 위해 투입되는 장비와 돈과 시간, 사람들..이 두가지 경우의 수에서 사람들은 계산하게 된다. 처음 이정수를 살려야 한다는데 저울추가 기울어졌다면 시간이 흘러 이 저울추는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럼으로서 사람들의 여론 또한 바뀌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그것이 똑같이 재현되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이기심을 언론에 계속 투영시킴으로서 여론이 바뀌었고,유가족에게 자식팔아서 돈번다는 소리를 하게 된다. 물론 단원고 아이의 부모가 보상금을 미리 받고 잠적했다는 소식 또한 언론을 통해서 재생산하였고, 세월호 유가족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물론 배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또다른 인명피해가 생겨나고, 잠수사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반복적으로 내 보냄으로서 세월호 유가족에 향했던 동정론에 대한 저울추가 뒤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소설 <터널>에 등장하는 언론들은 이정수의 구조에 대해서, 기적이라는 하나의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기적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라지게 됨으로서 동정 여론 조차 사라지게 된다.그것을 알고 대한민국 사회를 이해하는 것,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구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닌 그 약자를 자본주의가 소비할 수 있는 가치가 잇느냐 없느냐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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