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함영이 지음 / 말글빛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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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수렴 청정을 하였던 왕비 정희왕후..그동안 우리는 문정왕후나 인현왕후와 달리 정희왕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그러나 정희왕후가 조선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축으로 작용하였으며 연산군의 만행의 원인에 정희왕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극에는 정희왕후가 여러번 나온 적이 많았다.설중매의 정혜선,파천무의 최란,한명회의 홍세미,왕과 비의 한혜숙,왕과 나의 양미경,공주의 남자의 김서라,인수대비의 김미숙 모두 사극 속에 나온 정희왕후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사극 속에서 중요한 인물임에도 우리가 몰랐던 것은 정희왕후라는 이름보다는 세조의 부인 혹은 윤씨부인으로 기억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령청정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아린 아들이 일찍 죽는다는 속설과 신하를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생각...그러나 정희왕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모든 정사를 신하와 의논하여 결정하였고 한명회의 신숙주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손자였던 어린 성종을 위해 서로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정희왕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연산군의 어머니이자 성종의 후궁이었던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먹인 것...폐비 윤씨를 폐출시킴으로서 연산군의 만행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중종반정이 연달아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것이 없지만 만약 예종이 오랫동안 살아서 왕의로서 제 몫을 다하였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세조가 피부로 고생하여 죽은 뒤 예종이 임금이 되고 예종마저 20 이 채 지나지 않아서 죽게 된다..그리하여 정희왕후에게 있어서 임금의 조건이란 건강하며 병치레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우선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그럼으로 인하여 세조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이 아닌 둘째 아들 예종이 임금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조선사회에서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그 당시 피바람이 물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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