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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帛書 -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이상훈 지음 / 책마실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801년 순조 1년, 조선에는 신유박해 사건이 있었다. 천주교 인의 대규모 탄압과 정치적 숙청이었으며, 정조 임금이 승하한 뒤, 유약한 조선의 23대 순조 임금이 왕이 되면서, 정순황후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을 하게 되었다. 정조 임금 때 하지 못했던 남인 숙청이 본격화되었으며, 정약현, 정약용, 정약전,이 세 형제가 천주고 를 믿고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 과정에서, 조선은 천주교인을 조선의 질서를 흔드는 서학 죄인이라 하여, 그들의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황사영은 1775년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1790년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였던 황사영을 정조가 불러들였으며, 대과에 입격하겠노라, 약속하게 된다. 창원 황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를 눈여겨 보았던 이가.,정조 이외에, 채재공과 정약용이 있었으니, 정약용 형제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황사영과 정약용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정약용 형제들이 서학죄인으로 몰려 죽임과 유배형에 처해지자, 황사영은 토굴에 숨어서 밀서를 써내려 간다.13,000여자의 문장으로,천주교의 힘을 빌려서, 황사영은 조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었다. 그가 느낀 문제의식은 즉각 실행으로 옮겨졌으며, 신유박해의 서막이 열리게 된 셈이다.
정조의 죽음, 유약한 임금 순조, 정순황후의 대리청정(代理聽政) , 여기에 더해 남인을 숙철하기 위한 정치적 계략들이 맞물려 돌아가던 조선 중기였다.그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돌아가던 와중에, 황사영 백서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그를 한국 천주교사에서는 순교자라 한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 전체로 보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대의 변화가 필요했으며,낡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나라였다. 서학의 힘을 빌려서, 천주교의 종교적 가치로, 조선 사람을 일깨우고자 하였고,조선의 권력자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황사영은 백서 사건으로 인해 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에 이르렀으며,그의 아내 명련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황사영의 어린 자녀 황경한 또한 노비가 되고 만다. 125년이 지나, 숨겨져 있었던 황사영 백서 원본이 발견되었고,그 백서가 로마 교황청에 전달되었다. 순교자로서 황사영이 걸어온 길을 125년 만에 인정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