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서울 때문에 산다 한국프로축구단 2
피버피치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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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였고,1년 뒤 프로축구도 출범할 수 있었다. 초기에, 프로야구는 전용구장이 있었고, 박철순 선수를 포함하여,일본에서 활약했던 한국 선수들이 프로야구의 붐을 일으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각 구단마다, 그 구단을 상징하는 선수가 함께 했다. 프로축구는 그렇지 못했다. 그당시 프로축구가 프로야구보다 인기를 끌 수 있는 조건이나 상황은 매우 좋았다.독일의 차범근 선수가 활약을 했고, 유럽 무대에서 갈색폭격기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축구 구단은 전용구장이 없었고, 유랑처럼, 떠돌다가, 전두환 임기 말 , 1987년이 되어서야 자리를 잡게 된다. 1980년대, 안동, 강릉, 진주, 충무 등 돌아다였고,천연구장 없이 맨땅에서, 프로 경기를 이어나갔다.




2002년 월드컵 붐을 이끌었던 선수 최용수가 있었다. 럭키금성이라느 프로축구단도 있었고,유공이라는 축구단도 기억을 하게 된다. 이용수,박항서, 한문배, 왕선재, 이부열 등, 실업팀에서 뛰고 있었던 선수들을 프로축구단 선수로 기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FC서울의 창단 첫 우승과 함께, 1986년 멕시코 워드컵 본선 진출의 낭볻가 이어졌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쵝된다는 점은, 국가대표가 된, 프로축구 선수들이 해외 전지훈련과, 해외선수들과 A매치 경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력 누수는 불가피하였다.



1990년대, 프로축구 6개 구단은 지역 연고가 재조정되었다. 현대는 울산을 연고지로 하였고, 포철은 포항, 유공,일화, 럭키금성은 서울을 연고지로 하였다.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단은 3개 팀이었고, 나머지 3개 팀은 경상도를 연고지로 하였다.그로 인해, 어떤 장소에서, 축구 경기가 연달아 진행되었고,지금처럼 체계적으로 프로축구가 운영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이런 점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1980년대 프로축구의 현실과, 1990년대 한국 프로축구의 현주소를 알아볼 수 있었으며, 한국은 여전히 축구의 변방이자. 불모지엿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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