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도착하지 않는다
유래혁 지음 / 포스터샵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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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982년, 그해 1월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이 왔다. 머나먼 곳에서 바람이 불면 눈이 바닥에 닿질 못하고 하늘로 솟구쳤다. 수녀들은 병원 창가에 모여 서서, 그 황홀하기까지 한 장면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19-)



그 애는 모두가 촌스러운 하늘빛 하복으로 갈아입은 시기에 저 홀로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설의 눈에는 시골 강가에 홀로 떠내려온 도시의 세련된 꽃 같이 보였다. 어딘가 쓸쓸하게 아름다운. (-52-)



이럴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는 서로를 가만히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이란 절망적일수록 소리가 작아지는 법이었으니, 그날 하의 비명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5-)



그렇게 돈마저도 그녀에겐 송곳 같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해갔지만, 공포는 언제나 어머니라는 이름에 가려 쉽사리 드러나진 않았기에, 수도가 끊기거나 , 물에 채 끓기도 전에 가스불이 꺼지지 않았다면, 그 증상이 악화되고 있다는 걸 태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132-)



하지만 , 수년만의 재회,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늘어진 순간 속에서 태는 볼품없이 늦어버린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싸구려 인형 소각장에서 살아남은 듯 잔뜩 헝클어지고 푸석해진 머리카락.오래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커버처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잔뜩 구겨진 채 말라버린 하얀 셔츠만큼이나 갈피를 못 잡고 생겨난 얕거나 깊은 주름들. (-198-)



태는 투명한 유리에 생겨난 새하얀 땅이 쪼그라들다. 그 글자 마저 고백 같은 속삭임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꿈에서 깨어났다. 창문 너머, 소녀가 서 있었다.

레버를 돌려 창문을 내리자, 솜에 알코올이 스미듯 차가운 새벽 공기가 이상한 속도로 밀려 들어왔다. (-219-)



소설 『바람은 도착하지 않는다』 는 죽어가는 아이가 등장한다. 천사라 불리는 아이, 수녀 앞에 설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설이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아이, 태와 하가 있었다. 이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두 아이의 비극과 고통은 무엇을 잉태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하라는 아이는 좌심실 비대증을 앓고 있었다.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장기 이식해줄 누군가를 무한정 대기하고 있었으며, 수술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와 설이. 두 사람은 '나도, 나도 처음이야'라는 짧은 문장 속에 많은 것을 함축해 놓고 있다. 남들에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뭔가가,이 두 사람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음 속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온몸으로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을 드러내곤 했다. 하의 비명 속에는 절망적인 삶이 있고, 세상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는 절규를 표현하고 있다. 설의 공포에 찬 표정 속에 숨겨진 기괴한 몸짓, 이것이 말이 아닌 뭔가로 표현할 수 있음을 잘 드러내곤 했다.



설의 표정과 하의 마음은 연달아 무너지고 있다. 슬픈 도미노의 향연이기도 하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사랑이라 할하 수 있었던가, 하는 설을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다.



하와 설 , 두 아이는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였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단신으로 처리하고 마는 단순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숨어 있다. 삶이라는 것은 희극보다 비극에 가깝다는 것, 하의 의도와 무관하게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가냘픈 생명조차도 끝까지 책임져야 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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