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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원시장 -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
최현숙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3월
평점 :

더구나 ''망원 시장'아닌가. 내겐 로망의 공간이었다. 시장 안에서 사는 2년 동안 활기와 편리와 즐거움을 만끽했다. 냄비 물에 된장만 풀어 안쳐놓고 ,쪼르륵 계단을 내려와 두부와 호박을 후딱 사들고 올라가는 맛이라니. 운동과 장 구경을 겸해 저녁마다 시장통을 거쳐 동네를 걸었는데, 집계단을 오를 때면 떡볶이며 순대가 손에 들려 있곤 했다. (-6-)
그 다음 날 시아버님이 오셨더라고. 우리 아버지하고 시아버님하고 친구야. 지금 연세가 같은 88세인데, 시아버님이 오시니까 우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데, 90도로 절을 하는 거예요. 친구한테, 딸 낳아서 죄송하다고. 그게 나의 현실이더라고요. 딸 입장에서 내가 둘째 딸 낳은 게 무슨 죽을 죄도 아닌데, 내 생각은 그거예요.'내가 딸 만들었어? 자기 아들이 딸 만들었지.' 이런 생각인데 나는 시아버님이 그러고 가버리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굉장히 죄송스러워하는 그런 상황이었어. 그게 1998년 12월이었는데, 내가 되게 힘든 거야.아버지가 일어나서 90도로 인사를 하던 거를 생각하니까 굉장히 힘들었어요. (-55-)
저녁엔 알바 언니가 있으니까 빵이나 분식 같은 거 같이 먹지. 내 가게라고 언니한테 지키라고 하고 나만 밥 먹으러 갈 수는 없잖아. 문 닫고 같이 가면 모를까.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니까 분식 주문해서 먹고 그래. 혼자 있을 땐 그냥 대충 먹지. 라면 끓여서 반 먹고 반은 버리고 할 때도 많고 가게 하면 밥 먹는게 정말 쉽지 않은 게 배고플 때 라면을 하나 끓이잖아. 그런데 한 젓가락 먹으려고 하면 손님이 와. 두 번 세 변 손님이 왔다 가면 딱 먹기 싫어.그리고 손님 오기 전에 얼른 먹어야겠단 생각에 너무 빨리 먹는 거야. (-104-)
2008년엔가 시설 현대화한다고 저쪽 원래 시장 쪽을 월드컵 시장으로 세로 하고 여기 시장은 위를 다 씌우는 거야. 여기가 원래는 그냥 시장 들어가는 시장가였거든. 그거 씌우면서 시장이 정식으로 된 건데. 그러면서 우리 이쪽 천막 친 데를 전부 치우고 공원을 하려고 한다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어떡해. 장사 못하면 , 하던 걸 그걸 어떡해.그래서 우리가 권리 행사를 하려고 했어. 그 때가 열집이었나? 상인회에 자리를, 권리를 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야. 한 4개월을 싸웠는데 결국 우리가 졌어. 안 통했어. 뭐 난리 났지. 그중에 또 심하게 난리 치는 사람도 있었고, 골치 아프니까 아예 다들 장사 못하게 했어, 장사만 했다 하며 단속반 나와서 난리를 치고 그랬지. (-140-)
나 스무 살에 결혼했어. 몇 년도인가 알간? 내가 44년생. 몇 년도인지도 몰라.사는 것도 정신없이 살았어. 결혼하고 노고산동서 살았어. 신촌 노고산동. 거기가 옛날에 대영극장 앞이여.지금도 대영극장 있나?노고산동. 할머니네 저기고 나는 여기고. 그냥 한 집이나 다름없이 살았어, 나 잘못될까 봐. 나 시집살이 시키느라고 작은 할머니 바로 앞에다가 방을 얻었더라고. 나는 은근히 시집살이 했지. 스무 살 넘어서도 할머니 할아버지 바지 저고리 다 꿰매주고. 저기 살림도 다 해주고. 말도 못해 그 고성. 그분들은 손이 없었어. (-166-)
그래서 난 우리 애들한테 항상 미안해요.다른 집은, 우리 도련님만 해도 항상 모든 일은 애들이 우선이 돼야 되고 그러는데, 우리는 애들 태어나자마자 아버님 편찮으시고. 쉬는 날도 없었어요, 정육점 할 때는 , 명절 때나 집에 좀 갔다 오고, 어쩌다 쉬는 날 있으면 항상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요.애들은 항상 뒷전이었어요. 우리 애들은 이유식도 안 해줘봤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 먹는 게 없어요. 회사 친구 하나는 주부습진 생기고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이유식을 해주고 그러더라고요. (-212-)
그땐 내가 참았지.어쩔 수 없으니까. 그동안에는 우리 부부싸움 한번 안해봤어요. 그런데 꼬맹이 낳고 나서부터 부부싸움을 한 게,7년 동안 안 싸운 걸 9년 동안 무지하게 대판 싸운 거예요.
근데 지금은 내가 나이 먹으니까 알 것 같아. 그 전에는 내가 어려서 그 마음을 이해를 못한 거 같아. 근데 오십 후반이 되다보니까 '아, 우리 시어머니가 나를 먹고 살게 끔 만들어줬구나' 하고 이해가 가더라고.그 전까지는 몰랐어. 엊그저께 아들이랑 다 왔을 때 같이 가족 회의를 하면서 엄마 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나더라고 . 그때는 몰랐던게 나이 먹다보니까 고맙더라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지만 나를 사람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을 시켰구나.나는 우리 친정에서는 일이라고는 이만큼도 못했어요. 밥도 못하고 시집와서 우리 시어머니가 그걸 다 가르쳤어. (-258-)
구술 생애사 작가 최현숙 작가를 필두로 하여, 아홉 명의 구술 생애사 작가가 구술 기록하여 완성된 책 『이번 생은 망원시장』은 지금은 망리단길로서 핫플레이스가 된, 망원 시장 내 여성 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고상(?) 그 자체였다. 배우지 못해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망원 시장에 터를 겨우 잡아서, 시작한 장사는 , 평생 직업이 되었다. 삶 속에서 희노애락이 사정적이면서,서사적이며, 사실적인 구술생애사 곳곳에 스며들었다.
행복한 삶도 있었고, 힘든 시간을 견디는 삶도 존재했다. 인생에서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픈 일도 존재한다. 삶 속에서,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시간이 흘러서 그 나이가 되니 이해가 된다. 그리고 미안하고,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선에 대해서, 생각했다..때로는 노점상이라 하여,법과 제도의 사각지대 속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마원 시장 내 현대화 시설을 만든다는 이유로, 구청에서 신고 당하고, 쫒겨날 뻔 했다.이리 치이고,저리 치이는 신세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았다.
1990년대 IMF 의 어려운 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이 아니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배움이 짧아서,가난해서 시작한 일, 그것이 평생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점심이 되어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손님에 쫒겨서, 밥도 거르기 일쑤였다.2년마다 찾아오는 정기 건강 검진,하던 일을 접고 병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삶에 대한 애착, 억척스러운 인생에서, 오로지 가족이 함께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생에 대한 목적 이외엔 존재하지 않았다.벌어야 했고,가족도 돌봐야 했다. 임기응변으로 그때 그때 상황에 대처하였고, 자녀들을 먹여 살렸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았다. 오직 먹고 사는 일 뿐, 남에게 민폐가 되지 않았고,남을 등쳐 먹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겠다는 의지, 삼성 홈플러스가 망원동 인근에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안겠다는 것이 여성 상인들이 끈끈하게 연대하여,투쟁해서 얻은 성과였다. 여성 상인들의 일에 대한 가치관,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구술생애사의 취지를 9명의 여성상인의 구술과 채록을 통해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