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댜길레프의 제국 - 발레 뤼스는 어떻게 세계를 사로잡았나
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 김한영 옮김 / 에포크 / 2025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분홍신>에서 레르몬토르 발레단의 모델이기도 했던 댜길레프 모델은 고전발레 훈련을 받은 무용수들이 자애로운 독재자 밑에서 전세계를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무용단은 고전 작품과 새 작품을 섞은 레퍼토리를 공연하고, 개인의 후원과 박스 오피스 수익이라는 불안정한 재원에 의지했다. (-29-)
다만 브누아와 누벨에게는 더 희귀하지만 저속한 열정이 있었다. 발 발레였다. 유럽 다른 나라의 또래들에게 발레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취미였다. 발레는 독립된 예술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이루 말할 수 없이 어리석으며, 발레의 유일한 목적은 짧은 치마 아래로 쭉 뻗은 젊은 여성의 다리에 흥분한 음탕한 노신사들의 에로틱한 환상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39-)
댜길레프는 확실히 스캔들을 원했고, 아스트뤽의 주소록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는 신중하게 전략을 세웠다. 우선 사교계 모임에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공연의 드레스 리허설에 그 어느 때보가 많은 A급 유명 인사들을 초대했다. (-130-)
댜길레프는 내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기를 원했다. 여자는 성적으로 (그에게) 쓸모가 없으며,지독하게 멍청하고 욕심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걱정스럽게도 세르게이 파브로비치는 그런 일반화를 지나치게 좋아했는데, 그가 둘 모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정보는 놀라울 수 있다. (-250-)
아기발레리나들이 최초의 어린 무용수는 아니었다. 버라이어티 극장에서 유아 무용수는 오래전부터 흔했다. 1925년에 댜길레프와 계약을 맺을 때 멀리서 마코바의 나이는 겨우 열 네살이었다. 하지만 마코바는 몸이 허약한 탓에 무대에서 극도로 차분한 어린이 역만을 소화했다. (-332-)
줄리언 반스가 쓴 책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에 러시아 발레 무용수 댜갈레프(Diaghilev, 1872~1929, )가 웃으며 죽은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오십이 넘어,러시아 발레의 성장과 혁신을 도모하였던 그가, 발레를 예술이 아닌 사업으로 승화 하였으며, 보수적이고, 제국주의 성향을 지니고 잇는 러시아의 문화적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 책 『댜길레프의 제국』을 쓴 목적과 연결할 수 있다.
그는 19세기에 태어나,20세기에 사망하였다. 러시아 발레가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가,기존에 러시아인 뿐만 아니라,전유럽인들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중세 유럽 사회에 유행했던 교향곡, 클래식 음악 일색이었던 그들의 문화향유에 발레가 상류층의 사교계 문화에 흡수되었던 건, 음탕하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발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부터 바꿔야 겟다는 동기의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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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발레는 직름 우리가 보는 몸이 좋은 남성 무용수와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여성 무용수가 보여주는 춤예술이 아니었다. 무용에 대해, 매우 불량스럽게 보았고, 노신사들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두까끼 인형,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고전 발레를 새롭게 각색하고,기존의 발레가 동성애를 연상시킨다는 사회적 인식을 바꿔 나가야 한다는 걸 ,댜길레프는 인지하고 있었다.
상류층이 원하는 에술적 가치에 도전하였고, 러시아 발레가 세계적인 발레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그는 제1차 세게대전 직후에 사망하였지만, 흑백 영화 『분홍신』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그 영화는 1948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유투브에 고전영화로 볼 수 있다.,댜길레프가 추구하였던 예술은 무엇이며,그 당시 상류층이 발레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일깨워주고 있다. 즉 그의 도전은 유효하였고,러시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특히 러시아 혁명 도래기에 맞물려 ,러시아 발레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고, 옛것과 현재를 서로 연결하고 융합하는 전략을 씀으로서,보수적인 러시아가 추구하였던 전통 문화에 대해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