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클리스 : 다시없을 영웅의 기록 -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한 영웅의 질주
김신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953년 3월 26일, 레클리스는 험준한 산길을 오십 번 넘게 오르내렸습니다. 높고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무거운 탄약을 나르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레클리스는 탄약이 바닥나 절망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말 그대로 '전장의 구세주'였죠. (-14-)



불꽃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혁문은 아예 마사에서 숙식을 하기로 했다. 누나 정순이 오히려 말에게 해가 된다며 말렸지만, 그를 설득할 순 없었죠. 한강 동쪽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 쯤, 산고 끝에 불꽃이 새끼를 낳았다. (-55-)



미첼은 대원들 앞에서 이 연기를 찍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완벽하게 속은 대원들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 레클리스는 신호에 따라 멀쩡한 앞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그러 때면 지루한 전초기지의 분위기가 잠시 환해졌다. (-104-)



"금일 오전 9시 30분. 베가스와 리노를 강타할 예정입니다. 포병의 연막탄이 부족하지만, 리슨비 분대가 충분히 지원할 수 있습니다.고지르 완전히 점령할 대까지 포격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각, 콜먼은 레클리스를 준비시키기 위해 목초지를 향했다. (-154-)



QUD참부대 패터슨 중위RK DLTDJtEK.한국전쟁 승리의 1등 공신 미국 해병대의 병차 수송을 도맡았던 군마 레클리스 에 대한 이야기 책이다. 실제 미국, 한국 전쟁 기념관에는 레클리스의 실물과 크기가 비슷한 군마 동상이 만들어졌으며, 대한민국에도,연천에,레클리스 동상, 레클리스 기념관과 공원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중공군을 상대로 매향리 전투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고,서,한미연합국이 중공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건, 포탄 한 발에 11KG에 달하였으며, 산악 지대에 미군의 수송 차량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직 군마였던 레클리스가 포탄을 수송하였고, 부상병을 이송했다. 한국군인과 함께 숙식하였고, 경주마로 키워졌지만, 미군의 병참 역할을 위해 쓰여졌다. 한국 군인이 중공군을 상대로전세를 역전하였던 건, 수송을 도맡아 했던 군마 레클리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레클리스가 전장에 투입되고, 해병대 제1사단은 인천상륙적전을 무사히 성공한다. 북한군에 밀리고 있었던 국군의 전세가 역전 되었으며, 레클리스는 한ㄱ구이름 아침해였고, 군마이면서,키가 140cm에 불과한 노새였다. 그러나 산으로 포탄을 50여 차례 수송하였고,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레클리스에겐, 다리 부상과 눈이 다쳤지만,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엿다. 군마로서, 상병계급이었으나,전쟁이 끝나서,하사로 승진하였다.레클리스의 활약은 일반 병사 못지 않은 위대한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레클리스는 1960년 1월 은퇴한다.미국에는 6개의 레클리스 동상이 세워졌다. 



레클리스는 한국전쟁에 투입된 유일한 군마였다 인간들도 두려워 가지 못한 길을 레클리스는 두려움 없이 진행햇다. 레클리스는 한국 군인 100명 몫을 수행하였으며, 수천 톤의 포탄을 산을 따라서, 실어나름으로서, 고지전에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였으며, 한국전쟁 승리의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 경주마로 태어난 레클리스는 페터슨 중위가 훈련하여,. 굼마가 되었으며, 한국을 지킨 말한마리였다. 무모하였지만, 해병대원으로 당당하게 인정 받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