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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1 ㅣ 조선 천재 3부작 3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24년 11월
평점 :
그'다산비결'을 은밀하게 돌려가며 읽은 그들이, 1894(갑오) 년, 임금을 싸고도는 간신배와 썩은 관료들을 징치하고 무너지는 나라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일어선 동학군의 접주들이 되었다. (-7-)
어떤 사람의묘뵤지명을 쓴다는 것은, 쓰는 사람의 영혼과 그 당사자의 영혼을 사랑으로써 섞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셋째 형 약종과는 혼을 섞을 수 없었다. 그가 혼을 섞으려 하면 약종이 달아나고, 약종이 혼을 섞으려 하면 그가 왼고개를 틀었다. 약종과 그와의 사이는 다만 한 아버지 어머니의 피를 받았다는 의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셋째 형 약종의 영혼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몸을 받았을 뿐 영혼은 받지 않았네. 영혼은 여호와 하느님에게서 받았네."(_42-)
정약전이 과거 시험을 치를 때 시험관을 맡았던 사람이 이가환이었다. 이가환은 정약전의 벗이자 사돈 간이고, 그의 자형인 이승훈이 이가환의 생질이었다.
과거 시험에 출제된 문제가 '오행'에 대해서 논하라는 것이었다. 시험문제는 임금이 직접 출제를 했고,시험 감독관과 채점을 이가환 등에게 맡겼다. 임금은 늘 그랬듯 가장 참신한 인재를 뽑아달라 주문했다. (-121-)
'사나운 뇌성벽력은 햇빛으로 이기고, 강한 햇빛은 음음한 꽃그늘로 이기고 , 향기로운 꽃그늘은 물로써 이기고, 물은 달빛으로써 이기고,달은 해로써 이기고, 해는 밤으로써 이기고, 기나긴 밤은 잠으로써 이긴다.' (-164-)
정약용이 대답했다.
"그 일은 더욱 기묘하고 복잡해졌사옵니다. 사복시는 그 섬의 옆 육지 마을에서 솟값을 징수하고,거기에서 살다가 나온 사람의 친족에게까지 솟값을 징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장연지방이나 풍천 지방의 백성들이 곤욕을 견디지 못하고, 소의 장부를 작성해가지고,관아에 가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05-)
"나도 사실은 진즉부터 이벽 사돈과 그 이야기를 하고 싶던 차 입니다.이벽 사돈의 말에 따라 , 나를 뺀 나머지 세 형제들은 모두 다 천주학에 빠져들었습니다. 과연 천국이 있는 것인지, 그것을 제게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것이 만일 확실하다 싶으면 저도 천주학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벽이 말했다.
"노자와 장자는 천지 우주 속에서, 이 땅과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60-)
선비의 사업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잉잉거리면서 꽃을 찾아가서 꿀과 꽃가루를 머금어다가 통 속에 저장하고, 애벌레를 먹여 키우는 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에 깊이 빠지듯이 ,책 저술하는 사업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자, 금방 날이 저물고 밤이 짭았고, 배고픔과 추위도 잊을 수 있었다. 사약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313-)
소설 『다산』 쓴 작가 한승원은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쓰면서, 다수의 작품을 출간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조선 천재 추사 김정희, 초의 선사,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소설로 편찬하였으며,그가 조선 후기의 격변기 19세기 조선의 흐름을 읽어내고자 하였다.그가 쓴 세 편의 소설 (『초의』, 『다산』, 『추사』) 동학 혁명이 시작된 원인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소설 『다산』에느 정약용 일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었다. 정약현,정약전[丁若銓],정약종, 정약용은 조선 후기 천주학을 전파하려다가 유배형 혹은 순교한 케이스로 남아 있으며,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가족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이 소설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고, 정조임금이 재임하였던 당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 시험을 통해서,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려 하였으며, 노장 사상, 주희의 주자학에 깊이 빠져들었던 조선은 노론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인이 주도하면서, 서서히 천주학에 물들기 시작한다. 노론과 남인이 정조 임금을 둘러싸고,서로 경쟁하던 당시의 정황이 이 소설에 채워지고 있었으며, 신유박해로 유배되어, 흑산도에서, 14년간 머무르면서 쓴 자산어보에 대해서 , 그 저서가 조선 최초의 해양 생물학저서였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소설 『다산』 은 바로 천주학 귀신이라 불리었던 그 당시에 서학에 대한 이미지, 조선이 서양 문물에 대해서,배타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신유박해로 인해 천주학이 추구하였던 여호와 하느님과 우주 천지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하였던 새로운 변화와 시대적인 흐름이 어떤 전화;기를 맞이하였는지 확인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