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회 - 뜨거운 젊은 피를 태양에 힘껏 뿌려
최산 지음 / 목선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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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의 봉기는 23세의 국군중위 짐지회와 그 또래의 젊은 동지들이 '인민의 군인인 우리가 어떻게 제주 인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느냐'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저 그 순결한 마음 하나로 이승만 정부에 항거하겠다는 뜻을 만천하에 밝힌 사건이었다. (-7-)



김창복은 사관학교 졸업 후 태릉 1연대의 정보 장교로 임명되고 나서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좌익군인명부를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1연대 장병들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48년 5월에 특조과로 옮긴 이후론 전군으로 확대했다. (-50-)



김지회는 대비 태새 가화를 명령하는 한편 간부 회의를 열어 아지트 이전 문제를 논의했다. 문수골은 산밑에서 비교적 가깝고 골이 그리 깊지 않아 자리 잡기가 쉬웠던 만큼 적에게도 쉽게 노출될 터이나 더 깊숙한 곳으로 옮기자는 그의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피아골, 대성골, 거림골, 뱀사골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202-)



11월 12일 오전에 김지회는 최남구와 김종서에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왔다는 간략한 상황보고와 함께 다음 단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최수종을 불러 직접 가서 전해주고 답신을 받아오라고 했다. (-308-)



지회는 오랜만에 동지를 여럿이 모이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특히 홍순혁을 보곤 무척이나 기뻐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첫날 회의가 끝나고 나서 이기주까지 셋이 천막 회의실에 누워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바로 옆에 있는 막사인 지라 경진은 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415-)



지회는 토벌대가 두려워 뱀사골 계곡 길이 아닌 위쪽 비탈면을 타고 간장소로 향했다. 거기까지만 가면 경진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몸은 비록 너덜거렸지만,머리만은 단정해졌다.얼마 후면 태양도 떠오를 것이었다. (-529-)



소설 『김지회』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두달이 지나지 않아,여순반란 사건의 중심이었던 김지회의 삶을 엮고 있었다. 남한과 북한 ,좌와 우가 서로 대립하던 와중에, 남한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으며, 김지회는 여순 14연대에 속해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남한에 남아 있는 좌익 세력 척결, 빨치산 토벌 작전에 대해서, 명령을 거부하였고, 지리산 일대에 게릴라전을 펼쳣으며, 1949년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김지회느 제주도에 자신의 군대가 투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사에 한 여인이 있었다.이름은 조경진인며, 김지회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10대에 불과한 조경진과,이제 23살 육군 중위인 김지회는 2만명의 희생되었던 여순14연대 봉기 반란사건 안에서,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14연대에는 김지회 이외에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가 있었다.



김지회는 스스로 태양이 되고 싶었다. 수줍고,부끄럼 많았던 김지회가 용기 있는 선태글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작가 최산은 김지회의 실존 사진을 보고 ,궁금하였다.그 결과 여순반란사건 전체의 역사를 훑었으며, 김지회가 14연대 동지를 규합하여,지리산 깊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토벌대에 맞서, 어떤 선택을 햇는지 확인시켜주고 있으며, 76년전 그 당시의 지리산 주변 에 대해서, 남로당과 서북청년단이 이끌었던 제주도의 혼란스러운 남한 사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김지회 곁에 동지였던 이기주와 홍순혁, 신인형, 이들은 배사골,피아골 계곡 에서, 토벌대의 폭압에 맞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마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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