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역사 -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
피터 버크 지음, 이정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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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이후 법 분야에서는 정의를 눈을 가린 모습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선입견 없이 열린 마음을 갖고 본다는 의미로 무지를 상징한다. 같은 맥락에서 배심원단이 격리되었던 것도 선입견을 주어 평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9-)



당시 유럽에는 유대인들이 악마를 숭배하고, 성체를 훼손해 그 힘을 시험하고 , 도시의 우물에 독을 타서 페스트를 퍼뜨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또한 유대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의식을 위해 어린이를 납치해 살해하고 먹기까지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87-)



1983년 베트남전을 돌아보고 교훈을 얻기 위해 열린 회의에서는 무지의 문제가 줄줄이 제기되었다. 정책 입안자의 무지, 군의 무지, 대중의 무지, 베트남이 어떤 나라이고,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와 심지어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한 언론의 무지가 바로 그것이다.이 모든 무지에 대해 빠짐없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 (-174-)



이 항쟁으로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로부터 인도 통치를 넘겨 받았다. 영국 정부는 런던에 인도청을 설립하고 인도 담당 국무장관과 인도 총독을 임명했다. 전신,증기선, 철도가 생겨 양국 간 소통도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령 인도에 대한 공식적 무지가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240-)



오랜 역사를 가진 보험 산업은 선박 난파 보험으로 시작해 화재 보험, 조기 사망 보험 등으로 발전했다. 해상 보험은 난파에 의한 화물 손실이 흔한 위험이었던 중세 말기 지중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초기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에서는 노예가 법적 재산이었기 때문에 해상 보험에는 선박에 탑승한 노예의 생명도 포함되었다. (-304-)



히틀러도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추위가 닥치기 전에 러시아를 패배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준비 부족으로 많은 독일군이 얼어 죽었고, 다른 병사들은 동상에 거리거나 셔츠 안에 신문을 넣고 군복 안에 민간인 옷을 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 또한 침략군은 계획자들이 병참을 소홀히 한 탓에 충분한 차량, 예비 부품, 휘발유가 부족했다. (-331-)



특정 주제에 대한 무지나 의심이 어떻게 생성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을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라고 한다. 책 『무지의 역사』는 바로 무지에 대한 학문, 아그노토로지(agnotology)를 다루고 있으며,인류의 수많은 무지는 어떻게 만들어지고,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최근 100년간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 사고,전쟁, 재해,재난은 인간에 의한 무지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백화점이 무너질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백화점 측의 무지였다. 아파트가 붕괴되고,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바닷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시작되었으며, 반드시 인명 피해로 나타났다. IMF 부도 또한 국가의 최종 권력자와 경제학자의 국제 경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한민국 국가 부도의 사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 책은 무지의 역사를 전쟁과 엮어 놓았다. 베트남 전쟁,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무지가 어떤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제 사건들이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와의 교전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전한 이유도, 러시아 측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보의 부족, 무지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무지에서 나타난 결과다. 히틀러와 러시아의 전쟁은 독일군이 , 러시아의 추위를 느끼지 못한 부지였다. 마오쩌둥이 참새를 박멸하여, 중국 대기근을 초래한 것은 마오쩌둥의 정책에 대함 무지였고, 수천 만의 중국 인민들이 죽어 나간다.



이런 모습이 해외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타난 것도 한국인의 무지였다. 여성은 무지의 역사에서 피해자로 현존하였다. 여자가 배워서 어디 쓸 것인가 물어 보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얼마나 무지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무지의 역사에서,무지에 대한 투쟁은 역사적 진보,과학기술의 진보로 이어졌으며, 정치는 언제나 인간의 무지를 이용하고 악용해왓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당시, 서울 시민의 무지를 이용하며, 본인은 도피하였고, 서울 사람은 서울 도심에서, 죽어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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