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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
월송 구술, 조민기 정리 / 민족사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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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득 일엽스님이 월송스님에게 물었다.
"월송아,니 나이가 몇이냐?너하고 나하고 나이가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일엽스님은 일흔여섯이었고,월송스님이 서른을 넘긴지 서너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43년입니다. 노스님." (-24-)
1896년 6월 9일(음력 4월 28일) 김용겸 목사와 이마대 여사의 첫 딸이 태어났다. 결혼 6년 만에 얻은 첫 자식이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지옥엽이었다. 5대 독자 집안의 첫째로 태어났고, 밑으로 남동생들이 줄줄이 생겼다. 복덩이처럼 귀한 첫딸이 바로 김원주, 일엽스님이다. (-32-)
'나는 과연 나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마음을 자유자재로 다스리고 있는가?'
'나의 삶은 내 의지대로 나아가고 있는가?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나의 삶과 마음을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만공스님의 법문은 일엽 김원주의 정신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59-)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이것이 일엽 스님의 성정이다. 이러한 겸허하고 선지식다운 성저은 훗날 월송스님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 (-69-)
월송스님이 태어난 1940년, 순천에는 최초의 공립 학교인 순천 공립 여학교가 문을 열었다. 지금의 순천여자중학교와 순천여자고등학교인 순천 공립여학교는 처음에 4년제로 설립되었다가 1946년 6년제로 개편되었고 1951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월송스님은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인 순천여중을 거쳐 순천여고에 진학했다. (-90-)
정작 일엽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일엽스님이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담은 이유는 감정의 희노애락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랑 이야기는 방편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는 것이 본론인 셈이었다. (-149-)
훗날 누군가는 스님의 진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 당시 스스로의 마음이 왜곡되고 저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스님에 대한 소문은 대중의 호기심과 가십거리로 소비되면서 부풀려졌으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책임감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스님은 이조차 수행의 동력으로 삼았다. 깊은 통찰력 그리고 지혜와 자비의 마음으로 속상해하는 제자들을 보듬었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180-)
한마디 변명도 없이 분노의 화살을 맞고 있는 월송 스님을 위해 나선 분이 바로 일타 큰스님이었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아믐 일타 큰스님은 비구니 스님들이 월송스님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비구니 승가에 분란과 분열을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증명 법사를 자처하며 비구니 스님들과 월송스님의 만남을 주선했다. (-243-)
월송스님의 속명은 이송량이며, 1957년 , 순천여고를 졸업 후, 일엽 노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산으로 입산하였다. 1896년에 태어난 일엽 스님과 1940년에 태어난 월송스님의 일화 속에는 한사람의 위대한 생각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생전 네 편의 책을 남기신, 일업스님은,1971년 당시 전국 최초의 비구니장을 치루었다.
일엽스님은 신여성이었으며, 스캔들 메이커였다. 수많은 남성과의 염문과 소문이 난무하였다. 하지만, 일엽스님은 변명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부처님의 말씀에 다라서,내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행하였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물처럼 스스로 바꿔 나가면서, 자신을 자신답게 살았다. 그녀의 삶 속에는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누군가 자신이 일엽의 자녀라고 말하고 다녔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일엽 스님은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일엽,자신의 이름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도리어 이름을 팔아서, 한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자 부처의 말씀라 생각하였고, 대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
알희일비하지 않느 삶,원망하지 않는 삶, 누군가의 칭잔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바뀌는 것을 경계했다. 부처의 삶과 말을 따르며, 철저히 내 몸과 마음을 부처의 삶을 추구하였다.어떤 상황에 내몰린다 하여도, 호들갑 떨지 않았으며,자신이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하며 살았다.말의 무게와 행동의 신중함이 일엽 스님의 삶 전체에 관통하였으며, 죽음을 임박한 그 순간조차도, 평온한 삶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