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크면 지능이 높다고? - 통계로 보는 뻔뻔(FunFun)한 옛날 뉴스
김창훈 지음 / 갈라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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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도 복어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23년 12월 한달 동안 경성에서만 복어를 먹고 생명을 잃은 사람이 12명이나 되었습니다. 1950~60년대에도 매년 20~30명이 복어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2010년에는 탤런트 현석 씨가 복어를 먹고 중태에 빠지면서 복어에 대한 경각심이 다시 높아졌던 일화도 있습니다. (-40-)



요즘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아기를 길거리에 버리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곤 하지만 참 씁쓸한 세태였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은 해외로 입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953년 전쟁 직후부터 2021년까지 총 16만 9,000여 명을 해외로 입양돼 한때'아동 수출국 세계 3위'라는 오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94-)



1948년 서울시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직업은 바로 유흥가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 즉, '여급'이었습니다. 월급 없이 팁으로 생활하던 당시 여급의 하루 평균은 2,000원, 월 6만원을 벌었습니다. (-97-)



1969년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느 컴퓨터는 과학기술처, 한국은행, 보사부, 육군본부, 금성사 등 5개 기관에 사용중인 8대밖에 없엇습니다. 이는 미국에 컴퓨터가 보급된 게 5,000대 ,일본 2,000대에 비해서 미미한 숫자였습니다. 8대 중에서도 작동하는 컴퓨터는 5대에 불과했습니다. (-118-)



1922년에 1,700만 조선사람들이 일 년 동안 먹은 가축 수요가 총 41만 두였습니다. 그중에 소는 27만 5,800두였고, 돼지는 13만 926두, 말은 268두를 도축했씁니다. 특이한 사실은 당시에는 돼지고기보다 소고기가 더 식탁에 자주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129-)



경성시내 제일 부자는 일본인 나카무라 사이코라는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1,000만 원 이상이었습니다.

조선인 제일 부자는 '친일파'민영휘이며, 그의 재산 규모는 당시 왕실 재산과 맞먹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부정부패와 친일의 대가로 모은 재산이 당시 기준 6,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민영휘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인물 중에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36-)



일부다처제는 불법입니다.조선시대 태조이 중혼을 금하는 법을 시행하면서 일부일처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일부 양반가문들 사이에 일부다처제가 많았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처첩제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지역에 따라 중혼은 암암리에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180-)



아르바이트로 벌어들인 월수입은 입주식 가정 교사가 제일 많았습니다.가정교사는 숙식에 제공된 가운데 월평균 1만~2만 5,000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웬만한 직장인 월급 수준이었습니다. (-187-)



실제 조사에 따르면 1964년 대학 졸업생 2만 8,595명 가운데 취업자는 39%인 1만 1,085명이었습니다. 그나마 취업에 유리한 학과는 농림학계,체육계,공학계, 의약학계,사회과학계,사범계였습니다. 특히 축산학과 경쟁률이 18대 1로 경쟁이 제일 치열했씁니다. 농림학계가 졸업 후 취업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제조나 건설업종 등의 취업자 수는 타 업종에 비해 미미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산업구조가 1차 산업 중심으로 구성돼 제조업 기반이 미약했던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201-)



학위 과정으로 보면 박사가 711명, 석사 과정이 1,263명이었습니다. 전공 과목별로 보면 경제학, 화학, 전기공학 전공자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한편 당시 한국 유학생을 포함해 해외 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닌 학교로는 뉴욕대학이 3,29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마이애미 주립대, 버클리대, 컬럼비아대 순으로 조사됐습니다. (-213-)



1950년 6.25가 터지고, 대한민국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으며, 어느 덧 광복 79년이 되었다. 가난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삼시세끼 흰쌀법을 챙겨 먹기 급급하였으며, 미군정이 주고 간 꿀꿀이죽으로 하루를 연명하였던 이들이 많았다. 지역마다, 달동네가 있었고, 가난한 이들은 재개발, 재건축법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먹고 살았던 집이 헐리고, 좁디 좁은 골목길로, 달동네로, 옥탑방으로 피신하였다. 그 달동네에 화재가 나면,구조되지 못한채, 소방차가 들어올수 없는 상태에서,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서울에 가면, 청량리 역 인근에 588 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몸을 팔아서, 하루를 살았다.



이런 현실은 책 『머리가 크면 지능이 높다고?』에 쓰여진 1920~196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금은 복어를 먹다 죽으면, 뉴스에 뜨고, 경찰 수사가 들어간다. 아기를 산부인과에 출산하고,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미취학 아동이 방생하여,뉴스이슈가 떠서, 논란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 후 아기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사회 문제로 나타났다. 



가난했던 그 당시에 복어에 독이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으며,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상태에서 버려졌다. 배고픈 이들은 그 버려진 복어를 먹고 죽었으며, 뉴스에 단골로 떴다.1950년대엔,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발표, 뉴스가 올라왔다. 1980년대엔 전두환의 땡전 뉴스가 떴다. 한해 100만 명 아이들이 출산하였고, 가족계획 캠페인이 있다.지금은 아이들을 많이 낳는 가족 계획 캠페인이 실행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국가 주도의 캠페인이 큰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빈대떡 신사는 고소득자였다. 지금은 시골에 있는 다방이, 1990년대 전국 곳곳에 존재했다. 한집이 비워지면, 그 집에 다방이 들어섰다. 특히 건물을 올리면, 2층은 다방이 대부분이었다.옛날 드라마를 보면,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간간히 비추고 있다.대한민국은 고아 수출국이었다. 남아선호사상과 , 딸을 선호하는 풍토, 어일 적 기아 사망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채, 아이를 1년 동안 키웠고, 1년 사이에 아이가 사망하면, 호적 없는 아이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이장이 동네 아이들의 출생신골르 도맡아 했던 그 당신의 우리 모습이다. 한 동네에 태어난 날은 달랐지만, 호적에 등록된 생일은 똑같았다. 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많았던 그 당시의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조선 말엽, 민씨 일가가 조선을 장악하였던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민씨 일가는 조선을 망하게 한 원흉이었고, 그 안에서, 친일행각으로 스스로 살아남으려 했다.친일파 민영휘는 일본에 부역하였고,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그 당시에도, 취업 관련학과가 인기가 있었다. 컴퓨터가 대한민국 안에 8개 밖에 없었고, 축산학과, 농림학과가 인기 있었던 이유다.특히 사범대는 그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인기가 있는 학과다. 돈 있는 가정집에 과외를 했던 그 당시의 우리의 모습, 미국이나 유럽으로 기술, 공학,과학을 배웠던 당시의 우리의 모습들을 보면, 교육에 매진하고,학교를 세웠던 우리의 모습들이 ,후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다. 교육이 대한민국의 미래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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