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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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숨어 살았다. 거처는 『남부군』 을 쓴 이태 선생이 마련해주었다. 3년 동안 숨죽여 살았던 잠실 주공 1단지.바퀴벌레 들끓던 그 낡고 비좁은 아파트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밤이 되면 단지 내를 배회하고 ,낮에는 종일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영화를 봤다. 못해도 하루에 서너 편 이상 봤을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얻어온 비디오는 테이프 돌아가는 쪽에 문제가 있어 볼펜으로 누르지 않으면 자꾸만 테이프가 씹혔다. (-13-)



친구에게 아이가 생기고 집이 비좁아지자 데이브는 미국행을 결정했다. 가기 전에 지리산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매일 소주 두 세병 씩 마셔댄 통에 출렁이는 뱃살을 소유한 주제에, 데이브의 등을 떠밀다시피 지리산을 완주했다. 별이 유난히 밝았던 밤, 백무동 산장에서 우리 일행은 시바스리갈 18년산을 열었다. (-60-)



블루 한 병 사기 위해 동행자의 눈치를 봐야 했던 평소의 여행과 다리 방송국 것들은 위스키 구입에 거침이 없었다. 인당 두 병씩, 일행이 일곱, 그래서 블루가 열 네 병! 블루가 두 병씩 든 면세점 봉투가 일곱 개 줄지어 서 있는 걸보니 실실 웃음이 났다. 내 평생 눈앞에서 실물로 그만한 양의 블루를 본 건 처음이었다. (-119-)



알수록 모르겠는 회장님 인터뷰를 몇 차례 더 진행한 뒤, 회장님이 어릴 때 살았다는 제일조선인촌, 조선시장, 조선학교 등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였고,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해방 직후의 어떤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어린 A를 본 것도 같았다. (-181-)



카자흐스탄은 알아도 키르기스스탄은 몰랐다. 찾아보니 우즈베키스탄과 몽골 근처에 있는 나라였다. 고민 끝에 가기로 했다.이유는 단 하나, 함께 간다는, 날고 기는 사람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그때까지 주류에 속한 이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었다. 아니 기회가 없었다. 내가 주류가 아니니까. 주류인 그분들이 어찌 나 같은 빨치산의 딸을 끼워주기로 굘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인생 최초로 온 기회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202-)



그날 오후, 과사에 들렀다. 이승하 선배였는지, 남진우 선배였는지, 아무튼 이미 등단한 시인인데다 문창과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탁월한 비주얼로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두 선배 중 한 사람이 조교였는데, 나를 보더니 뭔가를 건네주었다. 아,그것은 선후배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대출권이었다. 그것도 장기 대출권! 나는 차마 받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것 하나를 받지 못해 어깨 축 늘어진 채 걸어가던 선후배들의 모습이 아른 거렸기 때문이다.눈치도 귀신같이 빠르지. 그래서 일찍 시인이 되었나? (-252-)



처음무터 술꾼은 아니었다. 재수하던 시절 신촌 독수리 다방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순천 고등학교 문예반장을 지낸 친구였다. 나는 순천여고 문예반장이었다. 좁은 동네라 백일장을 다니다 보면 그 지역의 글깨나 쓴다는 친구들을 다 알게 된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말을 건넸다. 문예반 모임을 같이 하자나. 지도교사에게 물었다가 혼구녕이 났다. (-311-)



작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북한,사회주의 , 주사파,남부군에 대한 이해를 한 사람의 인생사,가치관, 인생관을 통해서,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1990년대 『빨치산의 딸』에서 시작되었다. 그 소설은 그 당시 이적 소설이었으며, 출판사 대표는 이적단체로 인해,구속되었다. 그리고 정지아 작가의 에세이집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이 탄생된 배경이었다.



1965년 생, 정지아 작가의 부모는 빨치산이었고, 지리산 게릴라전에 투입되었다. 남부군의 산역사였다. 남한에 존재했던 빨치산,그리고 그 빨치산의 딸 정지아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지금과 같이 풍요롭고, 풍족한 삶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은 눈물로 들을 수 없는 가난 이야기다., 20대 중반, 소설 한 편 써서 수배되었기 때문에, 은둔하면서 ,정지아 작가는 자신의 허세로 인해 3년을 보낸다. 물론 그 당시 1988년 노태우 정부였다. 자유분방하였던 , 사회주의자 정지아는 비디오 테이프를 분풀이 삼아서,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결국 지리산으로 향하고 만다, 그곳에는 수배령에 처해진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을 것 같았다. 3박 4일 지리산 종주를 하기 위해서는 위스키 한 병이 필요했다. 소주나 맥주는 등산에 부적합한 술이기 때문에,독주 위스키가 제격이었다.하지만 착각이었다.지리산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을 만났고,숨겨놓았던 위스키를 하루 사이에,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술이라는 것은 참 독특한 물건이자, 정신이다. 그녀는 술을 마시고, 술을 통해서,인생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다. 아픔이었고, 슬픔이었으며,외롭고, 고독하고, 우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에세이집을 보면,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춥고, 불안하고, 분노에 가득찬 일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대한민국이 빨치산의 딸에게 관용을 배풀면서 달라지게 된다. 김영상 정부가 들어서고, 스스로 정지아는 안기부에 들어가게 된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대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아가씨가, 아빠의 성정을 닮어서인지,거침이 없었다. 어투는 전라도 어투였고, 행색은 촌년이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시티걸이라고 한다. 무너질 수 있는 삶을 붙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시티걸이라는 단어에 묶여 있었다. 스스로 일어섰고, 세월을 견뎌왔으며, 그녀는 결국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유투브를 통해서 토로하였고, 에세이집을 통해서,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서 ,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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