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선
이병순 지음 / 문이당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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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강진에 인민군이 내려와 마을을 수색해 우익을 골라 죽였다. 강진장터에서 인민재판에 벌어져 우익인사들이 공개처형 당하던 때였다. 부자들은 짐을 쌌다. 할아버지는 강진 갑부인 선단 주인과 거기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을 태우고 피란길에 나섰다가 낭패당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물 몇 모금으로 입을 축였다. (-58-)



나는 SSU 대원 못지 않게 강도 높은 훈련을 익히고 싶다며 신원표에게 매달렸다. 그는 재난대처법부터 인명구조, 수심 30미터 잠수하는 것까지 가르쳐 주었다. 수심 3,40미터까지 내려가는 잠수 훈련을 마쳤을 대 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수심 깊은 곳까지 잠수 연습을 하는 것만이 죽음의 공포를 약간이나마 덜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천만 번 공감했다. (-73-)



예전 관장과 달리 이번에 새로 온 관장은 실무를 중요시했다.바다에서 빠져 죽은 사람들의 혼을 달래서 위로하는 넋 거리굿이야말로 어떤 제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예전 관장에 비해 이번 관장은 여러모로 달랐다. 그는 안전기원제 따위는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하며 돈과 시간만 낭비한다고 여겼다. (-131-)



"하하하.청자 뿐만 아니겠지. 육상고고학은 오래전부터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봐야겠지. 웬만한 데는 전부 도굴됐고 다 파헤쳐졌잖앙.수중 고고학은 이제 시작인 셈이야.특히 우리나라는 수중유물 발굴 역사가 짧으니까 무슨 유물이 나올지 예측이 안 돼.아마 무궁무진할 거야." (-176-)



" 저기가 장산곶이잔하.여기서 저기까지 12킬로밖에 안 돼. 12킬로 너머가 북한이야."

마뇽은 횟집 창 너머로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바다에는 유람선과 해병대 순찰선이 떠다녔다. 순찰선 뱃머리에 태극기가 펄럭펄럭 나부꼈다. 그날은 해무 하나 없는 맑은 날씨여서 머리 황해도가 훤히 보였다. (-232-)



마뇽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수했다.풍덩! 나도 곧장 그의 뒤를 따라 물에 뛰어들었다.누가 밀어 넣기라도 한 듯 해저에 빨리 닿았다. 울퉁불퉁한 암석을 지나자 가마니 한 장 크기의 웅덩이가 패어 있었다. 웅덩이에 작은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했다. (-258-)



서해안은 수심이 낮고,물살이 센 곳이 많았다. 그로 인해 배들이 물밑으로 침몰하고, 갯벌에 파묻하게 된다.수백년 간 바닷속에 잡겨져 잇는 고고학의 증거들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건, 배와 함께 수장된 유물들이 인간의 손에 닿기 힘든 척박한 곳이었기에 가능햇다. 1975년 신안선이 발견되었고,1323년 중국 원나라 때 , 2백 톤급 무역선이었고, 2만 4천 여 점의 유물과 28톤의 동전이 실려 있었기에, 동아시아 수중 고고하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잇었다. 배 안에 있었던 고려 청자를 비롯하여, 그 당시의 동전을 발굴해냄으로서,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태안해양유물전시관이 세워질 수 있었으며, 신안선, 달리도선, 완도선 등 난파선을 발굴하는데 큰 역할응 하게 된다.



소설 『태안선』은 2007년 주꾸미가 청자를 들어올린 것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수중고고학이 SSU 대원, UDT잠수부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수중고고학은 육상고고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울돌목이 있다.배가 많이 지나가면서도, 바다 환경이 나쁘면,자칫 목숨을 잃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해마다, 바다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품습이 있으며, 태안선,신안선이 침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중고고학은 바다 속에 숨겨진 보물에 의존하느 학문이다. 그건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배가 건조되었던 당시, 고려 청자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유물과 문화재를 발굴하는제 힘써왔다. 강진에서 생산된 고려 청자가 개서으로 올라가던 도중에 태안 인근에서 배가 침몰하게 된다. 육상 고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로, 대표적인 것이 나라 교체기에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도굴된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의 찬란한 유산들이 통일신라시대에 파괴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하지만, 수중 고고학은 접근성에 제약이 있었고, 수천년전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었다.그것이 지금 수중고고학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였으며,작가 이병순께서,서해안 각지에서, 해양 유물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자료 수집을 할 수 잇었던 이유다. 그리고 갯벌에 묻힌 청자들, 수중유물 탐사대원, 위령제, 유물 수색 뿐만 아니라 보물선을 인양하는 것까지, 대한민국에 여전히 대학교 전공으로 수중 고고학과, 수중 발굴학과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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