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2-2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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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력 분쟁은 1949년 여름과 1950년 여름 옹진과 개성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시작됐다. 현장도, 등장인물도 , 첫 충돌도 비슷했다. 그러나 한 사건은 전쟁을 불러왔고, 다른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대한민국이 미국의 방어 또는 미군이 한국군을 공동으로 통제한다는 보장을 받지 못한 전후 역사의 1년인 1949년에 일어난 전투와 그것을 유발한 쟁점을 분석할 것이다. (-13-)

맥아더도 비슷한 생각이었다.1948년 3월 그는 케넌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생각한 방위선 체계의 의미를 분명히 밝혔다.미국은 "공격" 을 봉쇄하는 'U자 형 지역"을 설정했다. 거기에는 미드웨이, 알류샨 열도,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 그리고 "핵심 요새"인 오키나와가 포함됐다. 그러나 일본에는 기지나 군대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71-)

유엔 한국위원회는 한국에 체류한 미국의 부속적 존재일 뿐이었다. 아니, 그래야 했을지도 모른다. 맥아더는 대표들이 탈 비행기를 보내줬고,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은 지프차를 제공했으며, 주한 미국 대사관은 그들이 체류하는 동안 안내와 숙박과 식사를 담당하고, 서울 생활에 관련된 끝없는 불평을 처리해줬다. 남한에는 외국인 시찰자를 다루는 유명한 방법이 있었는데, 1949년 유엔한국위원회가 방문했을 때 그 방법이 널리 사용됐다. 1950년 초 유엔한국위원회 사무국이 38도선 시찰에 나서자, 기관총을 장착한 헌병대가 가득 탑승한 지프차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152-)

앞서 그리피스는 중국 정책을 둘러싼 불안이 고조된다면 애치슨은 "퇴진할 거라고" 웰링턴 구에게 말한 바 있다.앞서 본 대로 매카시가 이끈 반격 세력은 에치슨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매카시 이후로도 존슨, 도너번, 콜버그 등의 인물이 계속 있었다. 6월 7일 그리피스는 웰링턴 구와 둥셴광에게 애치슨은 사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주장했다. (-232-)

개성에서 더 동쪽에 위치한 38도선 부근 도시인 춘천에 있던 사람들은 6월 25일에 전투가 시작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음이 분명했다. 당연하게도 남한과 미국 자료에서는 그것을 북한의 공격에 대한 사전 경고라고 서술했다. 월러비의 한국 연락사무소(KLO) 소속으로 여겨지는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 정보 장교 토머스 D.맥파일은 자신이 북한 지역으로 보낸 남한 공작원들로 부터"풍부한 정보" 를 얻고 있었다. (-293-)

이런 사실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대편에게 보내는 매우 중요한 신호였다. 1980년대에도 공산국가의 현실정치는 미국의 힘에 맞서기보다는 특정 동맹국을 희생시키는 것을 선택했고, 소련은 자국의 실제적인 군사 억제력을 믿는 지역에서도 명확한 한계를 두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국 전쟁 관련 기록을 검토하면 북한은 군사 억제력 행사 지역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은 전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처음부터 확실히 했다.그러므로 우리는 스탈린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는 ,미국에 널리 퍼진 추정과 그가 소련의 이익, 위신, 군사력을 한국의 분쟁 상황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궁극적으로 미국이 북한을 분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조화시켜야 한다. (-373-)

남한에 유격대가 만연한 것은 미국이 적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전쟁에 직면했다는 뜻이었다. 인민군은 군복을 벗고 전형적인 농민의 흰 옷을 입은 뒤 그들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할머니나 10살 짜리 아이가 보따리에서 총을 꺼내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그 결과는 아주 더러운 전쟁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보통의 미군은 자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왜 싸워야 하는지 거의 몰랐다. 그들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습기와 잦은 폭우, 질척이는 땅에서 전개된 전투 속으로 던져졌다. 미군은 인분이 비료로 사용된 논을 묵묵히 걸었다. 그 냄새는 농촌에서는 일상적이었지만 처음 맡는 사람에게는 경악스러웠다. 목이 말라 논에 고인 물을 마시면 이질에 걸렸다. (-433-)

유엔군이 38도선을 넘는다면 중국 공산 세력은 북한을 원조할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 세력은 북한에 빚을 지고 있는데, 특히 국민당과 싸울 때 이홍관이 린뱌오를 지원한 것이다. 유엔군이 북한을 점령하는 것은 중국 영토에 위협이 될 것이다. 소련은 중국에 참전을 명령하고 있다. (-498-)

앞서 본 대로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한과 북한은 부흥했으며, 특히 남한은 세계 많은 나라에 필요한 물푼을 좋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큰 주목을 받았다. 내가 사랑하는 조국-내 조상은 1632년(한국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히데요시가 침략한 직후)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했다-은 수십 년 동안 어리석고 무의미한 전재을 계속한 결과,나치를 무찔러 얻은 국제적 지위와 거대한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켰다., 봉쇄체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은 급증했지만 그동안 비교적 소수의 투자가와 실업가는 자신들의 힘과 활력을 해외에 계속 수출했으며, 폴라니가 말한 "영광스러운 허구"와 크로더가 말한 "기묘한 치매" 또는 비어드가 말한 "도박에 가까운 모험"을 추구했다. (-547-)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2-2』는 전두환 정권 당시 대표적인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이제서야 온전한 『한국전쟁의 기원』 시리즈로 번역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해서,한국인이 생각하는 남침에 대해서, 북한이 생각하는 북침에 대해서,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한국인 특유의 국수주의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전쟁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북한의 도발이 옹진 서해 앞바다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첫 시작으로, 1950년 6월 25일 우리가 최악의 비극이라 말하는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북한이 남한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치밀한 계산에 의한다. 북한의 전쟁 개시 이전에, 남한의 전시 상황에 대해서, 채점을 하였으며, 1950년 전쟁을 수행하여, 남한을 삼킬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이 과정에서, 애치슨Dean Goodenham Acheson 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치슨은 1941년 국무 차관보로서 뉴딜 정책에 활약하였으며, 1945년 국무 차관에 승진하여 반스ㆍ마셜 양 국무 장관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일본 , 한국, 중국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 제 2차 대전의 전전(戰前) 전후(戰後)의 중요 문제 처리를 담당하였다.하지만, 애치슨은 6.25 전쟁으로 인해 , 1947년 사임하였으며, 1971년 사망하였다.

한반도는 38도선을 중심으로 유엔연합군과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두 나라가 서로 경게를 넘지 않도록 중재하였댜. 하지만, 우익이 주도하였던 이승만 정권의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남한의 좌익세력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미국이 내세운 무능한 지도자 이승만의 제스처가 북한을 자극시킨다.그 과정에서, 북한과 북한 뒤에 있는 소련은 남한과 전면전을 치루기로 하였으며, 1945년 6월 25일 새벽을 기점으로 서울 수도권 뿐만 아니라 한순간이 부산까지 물밀듯이 북한군이 남한을 침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CIA의 예측과 북한의 도발을 예측하였건만, 묵살되고 만다. 북한과 남한의 전면전, 멕아더가 이끄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수로 인해 다시 남으로 물밀듯 밀리는 전쟁 형세가 나타났다.그 결과 유엔과 미군의 오판 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공국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연합군은 네이팜탄 86만 6914 갤런을 B-29에 실어서, 폭탄으로 사용요하였다. 전쟁의 결과물, 네이팜탄 폭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겪은 고통 뿐만 아니라, 북한 군은 군인이 아닌 ,군복을 벗어 버리고, 흰 농민이 입는 옷으로 바꿔 입은 뒤, 유격대로 자신을 바꿈으로서, 농민들 사이에 자신을 은폐하였다.그 결과 약자,여성, 유소년이 타깃이 되고, 싹쓸어 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한반도 전역에 일어난 한국 전쟁은 실재로 한국인의 전쟁이 아니라, 1950년대 두 열강, 소련과 미국의 패권의 구축과 재편을 위한 명분 없는 전쟁이며, 이후 1962년 10월 쿠바 핵미사일 위기와 미국 간의 전면전으로 인해, 제3차 세게대전을 초래할 뻔 했다.

ㅂ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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