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우의 작은 신화, 하순섭 - 아직도 현역이다!
하순섭 지음 / 예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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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으로서 첫 조업을 시작했다. 태평양은 파고가 심해 선미를 높여야 하지만 대서양 어장은 달랐다. 고기를 쉽게 낚을 수 있도록 선미를 낮게 한 일본 배들이 하루에 30~40톤, 많을 때는 90톤까지 아획고를 올렸다.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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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공영애는 천주교 계통 데레사여고와 부산여대 육아과를 졸업했다.1974년 결혼을 하고, 1979년 내가 주제원으로 있던 아프리카 가나로 올 때까지 유치원 교사로 근무했다. 이곳 팔라우에 안착해 지금까지 평생을 일심동체로 나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냈다. 든든한 동반자였고 사업파트너였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따라준 분신이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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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눵 1`일, 이날은 나와 아내에게는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특별한 날이다. 팔라우 현지인이 아닌 한국인 하순섭 이름으로 사업 허가를 얻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식당을 시작한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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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우야무치는 억척스러운 분이었다. 어머니는 형 하옥동과 둘째인 나 하순섭, 여동생 하옥순, 막내 하진식 등 자식뿐 아니라 강복엽 할머니 슬하의 삼촌 하점부와 막내고모 하말달까지 키우고 공부시켰다. 삼촌은 형보다 한달 쯤 일찍 태어났을 뿐이다. 할머니는 나이 탓에 젖이 부족했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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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이 회장이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진행 사실을 전했다.우리 정부가 팔라우 정부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재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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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인회장 선거에서 덜컥 내가 당선되었다. 팔라우가 독립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먼저 회원들로부터 두루 만났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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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그룹에 있는 내 사무실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길을 벽 쪽으로 돌린다. 사무실 3면을 채운 상장과 상패와 학위증들 때문이다. 그중에는 2004년 1월 31일에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국민포장과 2015년 10월 5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받은 국민훈장 목련장도 걸려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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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순섭은 1943년 경남 사천 바닷가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억척스러운 부모님 밑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였으며, 부산수산대학교 어로학과를 졸업 후 , 고려원양 일등항해사가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다. 1975년 처음 인연을 맺은 납태평양 작은 섬나라 팔라우에서, 45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갔으며, 1990년 팔라우 한인사회 회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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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 참전햇으며, 해외주재원으로서, 한국을 널리 알렸던 하순섭은 팔라우에서, 식당을 오픈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였으며, 종합건설, 유통, 호텔 사업을 위한 '한파산업개발' , 부동산, 레저 사업을 우선하는'골든퍼시팍벤처' 를 운영하면서, 국가직속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민주평통 11기부터, 지금까지 20여 년간 열심히 살아왔으며,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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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며, 열정 가득한 인생을 추구하고 있었다. 회장 하순섭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으며,대한민국이 원하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팔라우에서, 한국인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 살아왔었기에 스스로 당당하다. 해상관광, 낚시, 다이빙 등 해양 관광사업을 추진하면서, 남태평양의 맑고 ,아름다운 바다를 관광사업과 연계하고 있으며, 다양한 장학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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