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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 - 가우디에서 임영웅까지 인생 후반전, 예술에서 삶을 재발견하다
유창선 지음 / 새빛 / 2024년 3월
평점 :





음악평론가 스티븐 존슨은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길고 긴 고립의 한 가운데에 빠져 있었던 나에게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완전한 혼자가 아님을,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음을 알려주었다.또한 어떤 신비한 차원에서 쇼스타코비치도 나를 '들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혼자가 아님을 음악은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음악은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나도 그렇다면서 위로와 치유의 힘을 준다. 역시 스티븐 존슨의 말이다. (-9-)
놀란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핵무기 시대를 열었으면서도 결국 실패해야 했던 오펜하이머가 겪은 내면의 복잡한 갈등이었다. 감독은 자신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에 초점믈 맞추기 위해,관객들을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몰입시킨 뒤,이끌고 가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예측가능하고 상투적인 장면들을 제외함으로써 놀란은 자신이 생각한건 메시지를 전달력을 극대화함으로써 놀란은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지의 전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40-)
"돈 안되는 국악을 왜 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좋아서 하는 거고 자존심이에요. 그래서 가진 빌딩이나 재산은 없지만 제 손으로 세운 '음악 빌딩'은 정말 많습니다."
이날 공연도 김수철이 10억원의 자비를 들여서 벌였다고 한다. 김수철은 저녁의 유료 공연에 앞서 낮 시간에는 무료 초대 공연을 했다. (-92-)
장욱진은 자신의 작업을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라고 말했다.목 디스크로 힘들어진 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서서 점화의 한점 한점을 그리고 있던 김환기,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던 박서보.그리고 지금 고백하고 있는 장욱진. 우리의 화가들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불태우는 성실함에서 어쩌면 이렇게 하나 같았을가. (-117-)
알렉스 오예는 노르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오페라 초반에 노르마는 높은 지위 덕분에 세상의 정상에 있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미끄러져간다. 노르마는 어쩌면 어려움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조국과 종교에 대한 반역자로 보기도 하지만, 노르마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사랑에 빠진 것? 엄마가 된 것? 둘 다 그렇게 중대한 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노르마의 가장 큰 죄라고 한다면,파괴와 전쟁을 광적으로 요구하는 신의 품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에 중독된 사회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것이다." (-165-)
하지만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용서했다는 해석은 오독에 가깝다."애가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살인자는 아니에요' 하고 말할 때 그 말은 ,그가 그런 살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내가 그런 살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에요.내가 뜻하는 바는 그가 끝없이 악한 존재라는 거예요.우리가 '범죄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에요." (-205-)
에르노의 글은 더는 '소설'이 아니라고 했듯이 문학적으로 꾸미지 않는다.그래서 그녀의 글들은 언제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래서 그녀의 글들은 언제나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그런데 문학적 치장이 없기에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역설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대한 사실적 기록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 개인의 얘기가 아닌 '나의 얘기' 혹은 '우리의 얘기'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런 공감의 힘은 그 어떤 투쟁의 구호보다도 강하다. (-258-)
유창선은 1세대 정치평론가이다. 그가 그동안 방송인으로서, 정치평론가로서, 작가로서 두문불출했던 이유는 5년 전 뇌종양 수술로 인해 투병과 재활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복잡한 갈등과 치유와 회복을 정치가 아닌 예술에서 구하였으며, 책 한 권을 통해, 5년 동안 어떤 사유와 삶을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책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에는 다수의 예술가가 등장하고 있다.예술가를 평할 때는 그 예술가가 살아온 삶과 주변 인물들을 수평으로 놓고 본다.그의 예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그의 예술적 삶과 말도 무시할 수 없었기 대문이다. 정치 평론가 유창선은 『오십에 처음 만나는 예술』 에서 예술가들에 대한 비평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중립적이면서,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고 있다.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가 추구하였던 문학적인 개성과 철학에 대해서, 유창선은 그녀가 쓴 소설 다섯 편을 정리하였던 이유도 ,아니 에르노의 문학적 사유를 자신의 글감으로 채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유창선은 아니에르노에 매료되었다.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뜨거운 논란의 중심이었던 독일 철학자 한나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응 보고 쓴 악의 평범성은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유창선은 한나아렌트의 생각 속에서 다양한 오류를 찾아내고 잇으며,인간의 행동 양식 속에 숨겨져 있는 이중적인 플레이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특히 대중들의 선과 악에 대한 생각과 하나아렌트가 생각했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다름으로 인해 ,하나 아렌트는 뜨거운 비난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연극 『더파더』는 많은것을 보여주고 있었다.실제로 부녀였던 전무송- 전현아 부녀의 연극이기 때문에, 연극이면서, 삶이 될 수 있었다. 내밀한 인간의 모습 뒤에 감춰진 인간의 나약한 모습과 두려움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삶 속의 정서적 교감과 공감 속에 펼쳐진다.즉 정치 평론가를 통해서 본 예술은 우리가 생각하던 예술가 다른 새로움이 있었다. 살아가면서,인간의 행동 너머의 본질을 놓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내 삶에 채워야 하는지, 한 사함이 흑과 백, 선과 악을 마주하면서, 대중적인 예술가가 아닌 정치 평론가적인 해석을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