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량형사
이종봉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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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하남시 이성산성에서는 당대척과 소위 '고구려척' 이,부여군에서는 남조척과 당대척 등이 출토되었고, 국립 경주박무관에서 성덕대왕 신종의 측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필자가 추구해온 연구의 방법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이들 자료를 정리하여 '고려시대 도량형제 연구" 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를 『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2001) 로 출간하였다. (-4-)

백제는 29CM 의 당대척을 어느 시기에 수용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6세기 후반 위덕왕 때를 보는 견햐와 7세기 초 무왕대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후자의 견해는 당대척은 수 문제 때에 이미 국가기준척(開皇尺) 으로 확정된 바 있지만 곧이어 양제 때에 기존의 척으로 환원되는 등 대척제 성립의 과도기로서 변동이 심하였고, 당대에 이르러 당대척이 국가기준척으로 다시 획정되었고, 무왕 21년 이후 해마다 다에 사절을 파견하지만 의자왕 11년 이후 관계가 악화되어 사정의 파견이 중단되었으므로,이때 당 대척을 수용하여 척의 개혁을 단행하였다고 하였다. (-52-)

신라의 저울의 단위는 이미 6세기 초 이전에 체계화되었다. 신롸와 토일신라시대에는 황룡사와 성독대왕신종의 조성에 근과 량의 무게 단위를 기록한 사례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으므로 저울의 단위를'량.근'을 중심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81-)

한편 고려시대 양기의 운용 문란은 무신정권을 전후한 시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무신정권 때 평두량도감을 설치하여 두,승은 모두 평미래를 사용케 하였으나 다시 원상태로 환원되거나, 양기의 운용에 대한 계속적인 대책이 발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기 운용의 부정은 양기를 불법적으로 제작하여 수세에 이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옛날의 조세납부는 민이 자량자개自量自槪 하였는데, 지금의 관리들은 대두로 잉여를 남겨 민이 고통스러워하므로 수령은 몸소 중외中外 를 감시하여 공사의 두곡을 같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이는 고려 후기에 공사의 양기가 동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안렴과 수령 등의 기강이 해이해져 여러 도의 향리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욕을 채워, 조세를 거둘 때 사사로이 대두를 만들러 사용한다고 하거나, 수조노 등이 관첩을 받지 않거나,관청에서 제정한 두곡을 쓰지 않은 자에게 장 100을 치라고 주문하고 있다. (-131-)

그러면 조선 후기의 황종척은 어느 정도의 길이였을까?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조선 전기에 제작된 황종척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영조 16년에 척을 교정할 때 겨우 세종 때 제작된 삼척부의 포백척과 『경국대전』의 칙수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척과 조선 전기의 척의 길이가 상호 유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183-)

장단부사 정한기는 관청의 곡으로 양을 많이받아 그 잉여부분을 사용하다 죄를 받거나, 지역마다 곡의 용량이 달라 어떤 조창의 곡은 큰 것은 17,18두가 들어가고 적은 것도 15,16두가 들어가서 뱃사람들이 받아들일 시기에는 또 곡 위에다 더 올려놓는 규정이 있어서 높은 경우에는 거의 1두나 되고 낮은 경우에는 반두가 없고, 심지어는 한 집안 안에서도 내외에서 쓰는 것이 다르고 한 점포 앞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제도가 달라서 이 고을의 죄(승) 가 저 고을에서는 거의 반말이 될 만큼 통일되지 않는 양기로 수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223-)

우리와 일본의 도량형법 제1조 내용은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형의 기본을 우리는 량으로, 일본은 관으로 기록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이는 형제의 기본 단위를 우리는 '근,량' 단위로 중심으로 하지만 일본은 '貫' 을 기본 단위로 하였기 때문에, 1902년의 도량형 규칙과 1905년의 도량형법 제1조에서 일본의 '관'을 '량'으로 바꾸어 서술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283-)

조선은 앞에서 이미 서술한 것처럼 1909년 도량법에 따른 척관법이 제도적으로 실시되었지만,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 등이 혼재하여 사용되고 있는 점도 '조선도량형법'을 공포하게 된 배경이 아닌가 한다.이는 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 일본과 동시기에 미터법 중심으로 하는 도량형의 통일를 도모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317-)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노경희 교수가 소개한 책이 『한국 도량형사』 다.이 책은 대한민국 5000년의 역사에서, 최근 100년의 역사를 제외하고,도량형이 하나로 통일된 바 없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길이,부피, 거리, 높이, 크기 에 대한 기준이 애매모호하였고,그대 그때 달랐다. 이종봉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자신이 박사 논문으로 선택한 박사 논문주제로 , 도량형을 선택하였고,극 결과 물은 『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혜안, 2001) 로 출간하게 된다.

여기서 도량형은 왜 중요한지,도량형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어던 일이 발생하는지 그 흔적과 도량형에 관한 역사기록을 살펴 보고자 한다.실제로 ,민과 관의 도량형은 달랐으며, 가족간에도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달랐다. 길이, 부피,양, 거리를 달리함으로서,그 차이를 착취, 수취,잉여의 대상으로 보았다. 자연스럽게 각 고을의 조세의 기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말할 수 있다.서울에서, 1KG 이 , 부산에서 1KG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조세 제도의 차이로 백성들은 세금을 낼 대, 더 많은 조세 납부를 해야 했다.이러한 경향이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인이 조선을 착취학 위해서, 처음 시작한 것이 도량형의 통일이었다. 일제시대에 '조선도량형법'을 공포하여 시행함으로서, 도량형 토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도량형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한국은 도량형이 제각각이었던 중세시대를 벗어나 도량형 통일로 인한 근대사회의 본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성덕대왕 신조의 무게를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 부석사 무량수전에 대한 자료 조사도 , 매한가지였다. 저자가 기준으로 하는 도량형, 저울, 자는, 지금 현존하는 문화재와 그 문화재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같은 문화제라 하더라도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일 때, 역사 기록이 달라지는 것은 불가피했다.이렇게 차이가 났던 과거의 모습은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시대-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량형 통일의 명분을 쌓아가게 되었고, 현재의 정확한 자와 무게,부피를 나타낼 수 있는 저울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 이기도 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길이를 재고, 무게를 달았던 그 당시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책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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