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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 1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평점 :

일년 만에 몸이 회복돼서 다시 학교에 나간 다혜는 더욱 소심하고 심약한 학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자기 또래의 친구들은 한 학년 높은 상급생으로 진급했지만 다혜는 지난해에 쓰던 교과서와 공책으로 똑같은 내용의 공부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어릴 때부터 잦은 병치레에 익숙해져 있는 다혜에게 신열과 두통과 공포와 알약은 차라리 친근한 벗들이었다. (-17-)
다혜의 걸음걸이에 보조를 맞추면서 그가 따라왔다.
"민우의 단 하나밖에 되지 않는 친구입니다. 난 불한당이 아닙니다. 나도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난 상과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박현태라고 합니다.낮술을 약간 마셨습니다. 그래서 혀가 조금 꼬부라지긴 했지만 정신만은 말짱합니다. 다혜 씨 무슨 걸음걸이가 그리도 빠르십니까? 지금 뛰고 계시는 겁니까, 걷고 계시는 겁니까?" (-87-)
"난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지요. 아버지는 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해주는 분이셨지만 어떤 때는 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해 주지 않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주삿바늘을 찔렀습니다. 난 무서웠어요. 난 창피스럽게도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아버지의 팔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지요. 손이 떨려서 여기저기 상처를 입혔으니까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다. 한 번 더 찔러봐라. 한 번더 찔러봐라. 그날 밤." (-159-)
집은 망해 재기 불능의 쑥밭이 되었고 가족들은 도망쳤으며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말도 운신도 하지 못하는 병상의 아버지 뿐으로 그는 식물인간과 다름없다고 민우는 말했다.
그는 조리있게 말을 펴나가지 못했다. 때로는 어눌하게 말을 더듬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격앙되어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261-)
순간 여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인은 피우던 담배를 눌러 껐다. 민우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신상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설마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겠지요? 김향숙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하지 않으시겠지요?너무나 어린 말의 기억이라 .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도 훨씬 넘은 오래전의 기억이라 모두 잊어버리지는 않으셨겠지요?아무리 오래전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고아원에서 함께 자라던 자매의 이름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339-)
최인호 (1945~2013) 작가의 소설 『겨울나그네』는 198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책 제목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차용했다. 이 소설은 1990년 손창민, 김희애 주연의 14부작 드라마 『겨울 나그네』로 제작된 바 있으며,소설 『겨울나그네』는 1980년대 정취를, 드라마『겨울나그네』는 1990년대의 우리의 모습을 서로 엮어 놓고 있기 때문에, 1960년대, 586 세대에겐 너무나 익숙한 사회적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의대생 한민우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불문과 3학년 정다혜와 부딪치고 말았다.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익숙하였던 그 당시의 모습이 소설을 채우고 있으며, 낭만가득한 대학교 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자신의 수첩과 다이어리는 한민우와 부딪치고,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민우는 그 다이어리로 ,다혜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가지만, 불문과 3학년 여학생은 정다혜가 없다며, 민우를 다시 돌려보내고 만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쑥맥이었던 한민우는 볼행한 과거가 있었다. 어머니 생사도 모른 채, 고아나 다름 없었다.그런 민우 앞에 다혜가 나타났고, 다혜와 민우를 엮어주려 하는,민우의 유일한 친구 박현태가 오작교를 놓고 있다.
소설은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드라마 『겨울나그네』 에는 담배 연기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오로지 유선전화로 통했던 당시, 다혜를 찾기 위한 불굴의 의지가 그대로 느껴진다. 드라마에서는 민우 친구가 다혜네 집에 장난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김희애와 송창민의 열연이 돋보였으며, 그 당시 순수했던 사회적 모습과 순정녀로 등장하는 유약한 이미지, 아름다움 하면, 오드리햅번 뿐이었던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