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분식집
이준호 지음 / 모모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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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가 의욕이라곤 전혀 안 보이는 축 처진 자세로 느릿느릿 걸었다. 골목 초입에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 옆에 잠시 멈췄다. 남들은 골목의 상징물이라며 좋아했지만 제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높고 큰 나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안짢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술에 잔뜩 취해 가만히 있는 나무에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16-)

아주머니와 헤어진 세아가 다시 짐을 향해 걸었다. 여전히 완만한 경사가 앞에 펼쳐졌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는 동안 이 길을 거의 매일 오르내렸다. 세아는 그다지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경사가 별로 심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오히려 운동이 된다며 세아는 좋아했다. (-55-)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은 지 1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굳은 것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매번 컴퓨터를 켤 때면 프로게이머의 손처럼 멈추지 않고 마구 움직이길 기대하지만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114-)

벌써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수미와 함께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수미가 함께 사는 노후된 4층 짜리 아파트다. 워낙 오래된 곳이라 건물들 전부가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그것을 하얀색 페인트로 대충 메꿔 더 누추해 보였다. (-156-)

사실 지금도 눈으로 천장을 볼 뿐 빗소리에 더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 어울리는 노래만 있으면 딱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감성이 너무 메말랐다. 종종 이런 날씨에 음악만 있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것처럼 감수성 풍부했던 당시의 제호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과거의 얘기가 됐다. 언제부턴가 타임머신은 작동하지 않았고 가만히 귀기울여 빗소리를 듣는 것이 최대일 뿐이었다. 예전처럼 그 감정에 충실하지못했고, 현실적인 고민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204-)

소설 『여우별 분식집』 은 2023년 12월에 쓰여졌다. 자가 이준호는 전작 『은둔형 외톨이의 마법』 이 있으며, 소설 『여우별 분식집』은 두번째 작품으로서, 작가 특유의 개성과 설레임이 스토리에 묻어난다.

『여우별 분식집』 에는 분식집 사장님 제호가 나오며, 제호와 함께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한세아가 등장한다. 소설가로서 자신이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줄 알았던 제호는 여전히 글이나 쓰는 글나부랭이에 불과하다. 아르바이트 한세아는 그렇지 않았다. 높은 곳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녀도 항상 긍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리가 굵어진다고 걱정하지 않았고,운동하기 좋아진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무기력한 사장과 긍정적인 아르바이트생을 비교하게 되는 소설 『여우별 분식집』 은 우리 일상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서민적인 코드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마치 주객전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설에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된다.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려면, 누구를 만나고,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소설가가자신의 주업이었던 제호에게 여우별 분식집 사장은 주업이 아니다.그래서 제호가 항상 무기력한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반면 아르바이트생 세아는 그렇지 않았다. 실패할 수 있지만, 항상 도전하고,그 과정에서 우연적인 성공을 얻게 된다. 여우별 분식집이 위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손님이 찾아올 수 있는 이유도 세아가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꿈이 빛나는 분식집, 여우별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마는데, 세아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꿈을 잃고 방황하는 사장 제호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변화를 완성해 나가는 이유도 한세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고,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여우별 분식집 사장 제호의 인생을 보면서, 누구나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틈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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