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들은 제1단계인 군권장악을 위해 1979년 12월 12일 18시 경부터 그 다음날 새벽 4시 사이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주축이 되어 기존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요원 및 그 후원세력들과 보안사 요원의 일부가 결탁하여 국군의 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전후방의 부대를 불법으로 동원하여 그들의 직속상관인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강제 납치 구금했다. (-10-)
내가 뜻하지 않게 수경사 참모장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선포로 국내외의 사정이 어렵게 전개되고 있던 와중에서 당시 수경사령관 윤필용 장군의 제2인자 발설로 야기된 세칭 윤필용 사건으로 사조직인 하나회 회원들이 숙청될 때 그의 참모장 손영길(육사 11기)장군의 후임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27-)
총장은 자리에 앉는 나에게 대뜸「교육과정에서 우등을 했고, 경력도 대부분이 전방 야전군 사령부 예하 부대의 지휘관, 그리고 작전참모 등 할 것은 다했군, 그러나 이에 비해서 후방근무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1973년에서 75년 사이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구만! 이제보니 장 장군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는 아주 적격자군! 」 (-68-)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금 30경비단장실에는 30, 33경 비단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학성 장군, 황영시 장군, 차규헌 장군, 그리고 노태우 장군,박준병 장군, 제1, 제3,제5 공수여단장, 71방위사단장 등이 모여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나는 여기까지 보고를 받는 동안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당장 30경비단으로 달려가서 그들을 박멸하고 싶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올랐다. 이러한 분노를 내 스스로 억제하기가 힘들어 보고를 중단시키고 담배를 꺼내 서너 대를 연달아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켜 나갔다. (-127-)
그런 일이 있은지 몇 년 후인 1987년 7월 8일 밤, 나는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켜 인근의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간신히 죽음만은 면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이 명은 수술을 받아야 하므로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1주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18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모반사건에서는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 되기 마련이다. 권력의 칼자루를 쥔 모반자들은 자신들의 부당했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마련이지만, 패배한 쪽은 승자를 정당화시켜 주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210-)
「나를 죽이기 위해서 김재규처럼 재판을 오래 끌 필요는 없지 안겠소? 여기서 조서를 받으려고 하는 것도 내가 한 일, 안 한 일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하는 모양인데, 나는 당초부터 내가 다 한 일이라고 분명히 말을 했고, 수사관은 그런 말을 다 기록까지 했지 않소. 그리고 나는 또 지금이라도 내가 요청하는 진압병력을 지원해 준다면 반란을 진압하고 역모자들을 모조리 색출 포획하거나 사살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한 다 하겠노라고까지 했는데 이제 무슨 조서작성이 더 필요하고 또한 재판절차가 필요하오? 그러니 나에게는 변호사도 필요가 없고, 이심 재판도 필요가 없고, 단심재판으로도 족하니까 빨리 좀 진행시켜 줄 것을 당부하오.」 (-251-)
그러던 중 앞에서 기술한 12.12 쿠데타를 거쳐 가택연금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딸 현리는 이미 외국어대학교 서반어과에 입학한 후였고, 아들 성호는 막바지에 접어든 대학 입시공부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좁은 집안에 보안대원 2명이 동거하고 있으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바람에 아비로서 아들에게 무척 미안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291-)
학창시절 피아노를 전공했던 이여사는 고등학교 여교사로 근무하다 1959년에 장태완 소령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다. 그런데 장 장군이 너무 강직하다 보니 장군이 될 때까지도 집을 마련하지 못했으며,거기다 1~2년마다 보직이 변경이 되어 이때마다 옮겨 다녀야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집이 있어서 장군의 가족들이 전방을 돌며 생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35-)
12.12 쿠데타와 연관된 이들 장태완(1931. 9. 13. 경상북도 칠곡~2010. 7. 26.),노태우(1932. 대구광역시~2021. 10. 26.),전두환(1931. 경상남도 합천~2021. 11. 23.) ,최규하(1919. 7. 16. 강원특별자치도 원주~2006. 10. 22.), 허화평(1937~)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1993년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 이전까지 대한민국 권력의 주축으로 움직였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에서, 12.12쿠데타와 5.18사건의 1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의 내란 및 군사반란 사실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며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하였으며,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는 첫걸음이 되고자 하였다.
2023년 11월 22일 개봉하였던 『서울의 봄』은 1200만 관객수를 돌파하였으며, 장태완역으로 나온 이태신(정우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영화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에 대해서, 장태완 수도경비사력관이 남긴 유일한 에세이 『12.12 쿠데타와 나』를 기본으로 쓰여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조망하고자 기획된 영화였다.그 영화가 개봉할 수 있었던 건,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가 사망하였으며,,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직접 5.18 유가족에게 사과를 하고 나 이후에 나타난 변화다.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이 남긴 유일한 에세이 『12.12 쿠데타와 나』를 처음 읽은 시점은 2002년 초였다.그 당시 대한민국은 월드컵 분위기에 들떠 있었고, 12.12 쿠데타에 관심을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단, 이 책은 12.12 쿠데타가 어떻게 일어났고, 수경사 사련관으로 장태완이 부임하게 된 과정, 윤필용 사건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활동하였던 군부 사조직 하나회가 추구하였던 권력과 정치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수경사라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자리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윤필용사건으로 ,하나회가 수면위로 드러난 것을 높이 사서, 장태완이 수경사에 최적임자로 생각했다.하지만 장태완 수경사 부임 24일 만에 , 하나회에 의해서 수경사가 가진 책임이 무력화되고 말았으며, 장태완은 가택연금상태에 놓여지고 말았다.
1950년 처음 소위로 임관하였던 장태완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이 될 시점에 터진 12.12 쿠데타로 자신이 처형 1순위가 될 거라고 예상하였다. 하지만 전두환 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조직은 장태완에게 처형 대신 , 수경사 자리를 스스로 물러나기를 종용하였고,이후,장태완은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수락하였으며, 금융관련 공공기관에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게 된다.
지신의 이러한 무책임과 무능력함, 실수에 대해 견딜 수 없었던 장태완,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던 아내 이병호가 쓰러지고,자신의 아들이 사망한 상태에서, 탄탄대로였던 딸 조차 수면제 다량 복용으로 자살시도를 하게 된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12.12 쿠데타 기록으로 채워진 『12.12 쿠데타와 나』은 그가 1987년 심근경색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극복하고, 마지막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 쓰여진 12.12 쿠데타 기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