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 가로수 이야기
박윤선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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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옥이 국립 의료원 정문 앞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안내' 가 프린트된 조끼를 입은 노인이 다가왔고 지하 2층에 자리한 영안실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승강기가 보이지 않아 가까이 위치한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순옥은 한 팔로 난간을 의지하며 왼 다리를 내딛고 오른 다리를 끌어당기며 내려갔다. (-11-)

처음 ,소아과 의사가 '기침서 중증소아천식'이란 병며을 전해 왔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아이의 증상은 기껏 감기 걸린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가벼운 기침이 전부였으므로, 하지만 의사는 본격적인 증세가 곧 시작될 거라 했고 그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집먼지 진드기나 털 알레르기가 원인인 천식과는 다른 양태를 보였다. (-34-)

동진아파트 103동 옥상에서 뛰어내린 여자는 단 한 번의 성공에 집중한 듯했다. 화단 나무에나 떨어져 목숨을 부지하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1~2호 출입구 지붕 마루 한가운데에 여자는 자리하고 있었다. 짧은 파마머리 아래 세 갈래로 흐르던 핏물은 배수구에 이르지 못하고 흔적으로 남았다. (-52-)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에 놀라곤 했다. 거리를 걸을 때도 행인들의 몸을 관찰하는 게 취미가 되었다. 중년의 여자는 물론 젊은 남자도 척추가 굽어 있기 일쑤였고 학생들은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척추가 뒤로 흰 거북목이 수두룩 했다. (-93-)

반나절이 지나고 연락한 희주의 휴대폰에서 없는 번호라는 안내를 듣고 어리둥절해지기 시작했다. 숙직실에 걸려 있던 배낭과 사물함 속 그녀의 옷들이 모두 사라진 걸 발견하고 나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짐이 저지 않았으므로 최소한 며칠 전부터 희주는 준비했을 터였다. 나는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톡도 문자도 심지어 손으로 쓴 족지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 (-100-)

여자의 시선이 차창 너머 허공으로 날았다. 공주에 뜬 아이는 몸도 가벼운 데다 무력해서 거리에 선 사람들이 고개를 꺾어 들 만큼 큰 호(號) 를 그린 다음에야 지상에 떨어졌다. 여자는 아이의 몸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고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잠시 멈췄던 숨을 되돌려 놓느라 고개를 숙인 여자의 뇌리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104-)

급정거 소리가 이어졌다.

진입로를 벗어난 BMW 는 반 바퀴를 회저한 뒤 대각선 방향으로 정지했다. 소리가 그치니 시간도 따라 멈춘 듯 했다.운전석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내려섰다. 호피 무늬 털코트에 가족 스커트 차림이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던 여자가 비틀거렸고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못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142-)

그때는 알지 못했다.답이 없는 의문에 오랜 시간 매달릴 거란 걸. 덮었다 꺼내고 헤쳐 보다 다시 덮는 시간이 반복될 거라는 걸.

나는 칠년 동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마침내 권에게 던졌다.

"준이 사고를 직접 목격하셨나요?"

장비 정리는 마무리 중이었지만 권은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대답없는 그에게 다음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 나는 마냥 기다렸다. (-164-)

소설 『야자 가로수 이야기』에는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사랑스러운」,「기침」,「야자 가로수 이야기」,「터치맨」,「손」,「파수(把守)」, 「상승 기류 속으로」이다. 이 일곱 단편 소설의 공통점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느 것이며,인간의 삶에서 죽음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의 삶에 대해, 누군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 있다.죽음은 나를 가볍게 해주고, 나의 실존의 매듭을 풀어 버리고 있다. 죽음에 대해 무겁게 생각하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해 주는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죽음은 매순간 우연에 의해 발생되지만, 인간은 완벽한 죽음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내 삶이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윤선은 일곱가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면서도,그 죽음을 우회해서 말하고 있었다.글과 글 사이,문장과 문장 사이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하여,누군가 죽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으며,그 죽음의 배후, 목격자, 원인, 과정까지 ,시간과 장소, 관계의 맥락에 따라서, 철저하게 사유의 형식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을 파고들어간다.

죽음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뼈조각 하나라도 찾고자 한다. 살아남은 자의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죽음의 흔적이 남기기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죽음이 비참함으로 끝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어야 하는 운명 속에서,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 지키고 싶어하는 원칙과 절차를 놓칠 수 없다. 박윤선은 그걸 이 소설에 채우고 싶어한다. 어디에서 죽어가든, 누구에 의해 죽어가든지 간에, 죽음을 은폐하면서까지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하며, 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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