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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일기 - 조선의 미래를 고민한 실천적 지성의 기록 ㅣ 클래식 아고라 4
이이 지음, 유성선.유정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2월
평점 :
윤원형이 죽었다. 윤원형이 몰락했을 때, 백성들은 거리에 모여 욕하고 기왓조각과 돌을 던지는가 하면 ,심지어 활을 쏘아 죽이려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윤원형이 몰래 교하(경기 파주) 로 떠났으나 ,원한을 품은 사람이 쫒아 올까 겁이 나서 다시 강음으로 몰래 옮겨 가서 그의 첩 정나정과 함께 매일 울분을 머금고 서로 울기만 하였다. 이대 윤원형의 전처 김 씨의 계모 강씨가 형조에 글을 올려,정난정이 김씨를 독살하였다고 고발하였다. (-21-)
이어 김개는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선비 된 이는 마땅히 제 몸이나 단속하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위 선비라는 자들은 제 행실은 부족하면서도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하며 대신들을 헐뜯고 방해하니,이런 풍조를 길러서는 안 됩니다. (-80-)
1572년 선조 5년 저월, 벼슬에 뜻이 없이 초야에 묻혀 살던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 建仲 으로, 그 성품이 청렴하고 절개가 굳었다. 젊었을 때는 과거에 힘썼으나 그가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139-)
노수신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이가 경연에서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하니 일이 새길까 염려된다. 내가 말리고 싶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 말리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물러가면 말이 없을 것이니 노수신의 근심도 없어질 것이다. (-244-)
명예를 좋아하는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이익을 좋아하는 행위는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승지 정언지의 말은 지금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말입니다. 학자의 고집으로 말하자면 명예를 좋아하는 부끄러움이 좀도둑질보다 심합니다. (-318-)
종 2품 동지중추부사 허엽이 죽었다. 허엽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였으나, 견해는 앞뒤 조리가 없었고 문자의 뜻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언젠가 이황과 학문을 논할 때 그의 견해에 잘못이 있었다. 이황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427-)
사헌부 대사헌 이이가 경연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개 사람에게는 각자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산해 같은 사람은 평상시의 직분을 맡아서 관직을 지키는 것은 남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이조판서가 되어서는 그 직책에 전념하여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오로지 공정한 논의만 따랐습니다. 일체 청탁이 없었으며, 대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고, 오직 착한 선비 만을 듣고 보아서 벼슬길을 맑게 하는데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498-)
만일 천재지변에 응하기를 참된 마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나라는 이로 인하여 어지러워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운 자가 오래되면 점점 법률과 제도의 폐단이 생기고 민심이 해이해집니다. 그런데 이때 어진 임금이 일어나서 타락된 것을 말끔히 제거하고 그 정치를 고쳐애만 나라의 기세가 떨쳐 일어나 운명이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니,이런 현상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534-)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다. 율곡 이이 (李珥) 는 1536년 음력 12월 26일 태어나 1584년 음력 1월 16일 사망하였으며,조선의 문신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다.,이이의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한편 이이는 명종 3년 1548년 진사시 초시를 시작으로 29세 때인 명종 19년 1564년 식년 문과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에 걸쳐 장원을 해 이른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으며,그를 조선시대 최고의 대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율곡 이이가 남긴 『경연일기』에서, 조선시대 왕들과 신하가 학문,기술을 강론ㆍ연마하였으며, 왕은 경연을 통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였다. 왕 스스로 경연을 적극 장려하였을 때, 조선은 태평성대 (太平聖代)를 이루었고, 대표적인 임금으로, 세종과 영조, 정조 임금 때이다. 반면에 인조 때는 경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조선은 그 당시 위태로운 난세였다.
『경연일기』를 완독하면,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선비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선비에 대해서,청렴, 결백, 기개와 절개, 간언과 직언을 하는 학자들을 통상적으로 선비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선비질이라고 조로의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가 있으며, 선비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서로 섞여 있었다.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 속에서는 진정한 선비의 자질을 제대로 적어 놓고 있으며, 학문에 힘쓰며,재주를 갈고 닦아야 하며, 남명 조식처럼 벼슬에 나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이들을 선비라 한다.조식은 스스로 제자르 만들지 않았지만, 스스로 조식의 문하생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책은 선비정신의 본질을 얻을 수 있다. 청렴함, 강직함 뿐만 아니라, 항상 배움에 뜻을 품고 있으며, 세상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하는 이들이었다. 즉, 세상이 혼란스러운 국운에 처해질 때, 선비는 스스로 갓을 벗고,나라를 구하는데 힘써왔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스스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들을 선비라 한다. 율곡 이이가 살아 생전 왕에게 직언을 하면서 ,왕이 싫어하는 말을 주로 하였고, 노수신은 그러한 이이의 성향을 걱정한다
경연을 통해서, 나라의 근심과 걱저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특히 율곡 이이가 살았을 당시 흉년과 전염병이 조상 전역에 감돌았으며, 왕은 율곡 이이와 경연을 통해 , 자신의 과오가 없는지 두루두루 살피었으녀, 가벼운 죄를 지은 이들을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지금과 달리 조선의 산에는 야생곰과 호랑이가 있었고, 민가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조선사회의 모습이 『경연일기』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