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 푸른사상 산문선 53
권영민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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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님 생각이 나면 이 방에 들어와서 책 들을 펼쳐 보지.그리고 자기 의자에 앉아 차도 마시고."

어머니는 고향 집에 내려온 나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어떻게 책장 열개가 필요한 것을 단박에 알았느냐고 하신다. (-33-)

나의 서당 글공부는 초등학교 (당시는 국민학교라고 함) 입학한 뒤 두 어달 지나서야 끝났다. 천자문을 끝낸 뒤에 한문 공부는 「동몽선습」 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은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동몽선습』의 첫 구절인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 수귀호인자는 이기유륜야니라)'를 수없이 읽었지만 '천지 간에 있는 만물의 무리 중에서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오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곁에 앉아 『논어』 를 큰소리로 읽어가는 총각들에게 장난을 걸고 새 새끼를 또 잡아다 달라고 조르는 것에 더 열중이었다. (-82-)

나의 책 읽기를 가장 아름답게 여긴 사람은 누님이었다. 누님은 국민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계집아이는 소학교 나온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 누님은 초등하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앞에 나가 답사를 읽었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 졸업식을 구경했다. (-133-)

나는 미국에서 부친 소포가 아무 문제가 없이 한국 설악산 계곡의 백답사까지 전달된 것이 기뻤다. 더구나 무산 스님이 오현 스님께서 포도주를 잘 받았다는 답장까지 미국으로 보내주신 것이 반가웠다.나는 곧바로 다시 무산 스님께 편지를 써보냈다. (-185-)

1986년 봄학기 강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큰 충격과 절망에 빠져 들었다. 개강하는 날 한 명의 학생도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과에서는 몇 명의 학생이 수강 신청을 했는지 알 수 없다면서 두 주일 정도 지켜보자고 했는데, 그 뒤 학생 한 명만이 정식 수강 신청을 하고 강의실에 나왔다. 하버드의 교무 규정에는 최소 세 명 이사의 학생이 수강 신청을 할 경우에만 그 강의를 정식 강좌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는 결국'실험 강의' 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었고, 학생을 위해 강의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성적은 정식 학점으로 인정한다고 통보해 왔다. (-210-)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권영민 교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어국문학과 입학 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초빙교수, 일본 도쿄대학교 외국인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 현대문학사 』,『한국계급문학운동 연구 』, 『소설과 운명의 언어』 등의 저서가 있었다.권영민 교수는 1948년 생으로서 나의 큰아버지와 나이가 같았다. 봄이 되면 배가 고파서 산과 들로 다녀야 했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면, 공부하기 힘든 사회적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광복후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하였고, 그는 국민학교 입학 전 처음 서당 교육으로 천자문, 동몽선습으로 시작한다. 변변한 교통 편이 없었던 그 시작, 주경야독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건,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누나의 물심양면에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 눈여겨 볼 것은 저자의 나 잇대에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정서였다. 우리가 살아온 삶과 다른 저자의 삶 곳곳에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가까운 생이 존재한다. 자연과 벗하며 살아왔으며, 스무 살이 되던 해 , 원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제일 기뻐했던 기억, 고향 집 사랑방을 사용하였던 것, 하버드 대학교에서 있었던 저자의 흑역사까지 걸어온 마음 따스한 정서가 존재한다. 특히 대학 4학년 때,중앙일보에서 시행하였던 신춘문예 평론 부무에 당선되었던 일화가 있었으며, 사백 매가 넘는 자신이 쓴 논문을 정리하여 단독 평문으로 고치는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를 전보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자신의 삶 속에 잊혀지지 않은 일화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지금처럼 편리한 삶을 살아온 MZ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그 당시의 삶, 그 안에서 저자가 걸어온 인생, 이십 대의 불안하였고, 병역 징집, 취업 문제, 눈앞에 놓여진 떨리는 행운까지, 통금이 존재하였던 1960~1970년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까지 볼 수 있다.우리의 아버지는 이렇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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