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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강인숙 지음 / 열림원 / 2023년 11월
평점 :
6.25 동란 때 , 등화관제의 어둠 속에서도 그렇게 웃고 까불어서 밤마다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계집애가 여섯이나 되니 웃음소리도 컸다. 일을 잘못 처리해서 할 말이 없자 다급한 김에 옛날에 하던 욕을 내뱉기는 했지만, 내 허리가 염려스러워서 잔뜩 켕겨 있던 작은 언니도 그 웃음 덕에 기력을 회복했다. (-25-)
바르셀로나에서 마중 나온 차는 피아트 7인승이었다. 그런데 피아트에는 뒤쪽 짐칸을 가리는 검은 덮개가 잘려 있었다. 대낮에 행드 캐리어 여섯 개를 몽땅 실어놓고 내려도 밖에서 보이지 않으니 신겨을 쓸 필요가 없었다. 진작 피아트를 타고 다녔으면 백팩이나 핸드백을 들고 거리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테니 백치기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림살이는 눈이 보배라더니 장사도 눈이 보배인 것 같다. (-101-)
왕년에 댄디 보이였던 작은형부는 자기가 옛날에 얼마나 멋쟁이였는지를 증명할 때 몇 가지 명사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고고방'이다. 형부는 자신이 최고 명품인 코르도바산 '고도방' 제품을 애용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고도방은 코르도바에서 만든 가죽 제품을 의미한다. 코르도바는 가죽 제품이 유명한 고장이다. (-143-)
평생 일벌로 앞만 보며 고지식하게 살아온 어머니가 칠순 잔치 때 처음으로 춤을 추시던 생각이 난다.그 며칠 후에 쓰러졌으니까 그날은 어머니의 마지막 생신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어머니는 , 춤 한번 신나게 추어보고는 총총히 이승을 떠나셨다. 삶의 아름다운 피날레였다고 생각한다. (-216-)
그 불빛에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애랫배 부근에서부터 서서히 오한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며 척추를 경직시켜버렸다. 조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277-)
저녁 여섯 시에 그레이하운드로 워싱턴을 향해 떠났다. 조며이 된 캐피털의 첨탑이 신기루처럼 공주에 떠 있을 미국의 수도 워싱턴. 그 곳에 가면 아직 40대 초반은 나는 갑자기 다섯째 할머니가 된다. 다섯째 아들에게 시집온 내가 스물여덟에 본 큰댁 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시댁 조카인 길자의 아파트는 그동안 내가 손님으로 묵었던 집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작았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할수 없었다. (-319-)
나이가 70세에 가까운 동생에게 "쪼꼬만 계집애가 뭘 안다고 까불어"라고 야단을 퍼붓는 언니의 말이 배꼽을 쥐는 웃음의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홍수로 폐가가 된 성안에 있던 외딴집으로 돌아가 다시 어린 계집애가 되어, 남의 아내와 어머니, 할머니로 살아온 세월의 삶의 무게를 잊어갔다' 라는 대목에 눈물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미 한두 가지의 지병을 지니고 있는 병약한 노인들이 된 네 자매가 '남의 아내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된 후'에 신비한 기적의 힘으로 다시 '조꼬만 게집애'가 되어 순식간에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던 것이다. (-392-)
책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을 쓴 강인숙은 고인이 된 이어령 교수의 아내이자 ,현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겸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남편 없이 홀로 된지 어느 덧 1년이 지난 현 시점에 출간된 책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은 ,2002년 70세가 된 강인숙 교수가 ,2002년 당시 자매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추억들이 한 권에 담겨져 있다.네 자매는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까사밀라까지 행복한 스페인 여해을 떠나게 된다.
처음 스페인 여행은 자매가 함께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다. 아내 강인숙과 남편 이어령이 떠나는 두 사람의 여행이다. 서로 아끼고 존중해온 두 사람이 떠난 여행에 차질이 생겼고,이어령 교수가 석좌 교수가 된 직후였다. 네 자매가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나게 된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이면서,할머니였던 자매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여성으로서 느껴야 했던 족쇄에서 벗어났다. 스페인 여행은 오롯이 네 자매의 몫이었으며, 나이를 잊고, 세월을 잊고, 십대 소녀로 되돌아가는 행복한 순간이자 기쁨이다. 6.25 전쟁을 경험했던 그들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왔다. 공포스러운 순간에도, 소녀로서 살아온 쪼그마한 계집이었을 때가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1950년 대~1970년대를 살아온 이들이 알수 있는 소중한 경험과 추억들이 한가득하다. 책에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아픔도 곳곳에 소개되고 있었다.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 아름다운 피날레를 꿈꾸게 된다. 지금 MZ 세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추억 이야기, 물질적으로 부족했지만, 공간이 협소했지만, 마음이 편했고, 행복했다. 추운 겨울, 그들은 서로 나눌 줄 알았고, 서로 고통과 아픔을 분담할 줄 알았다. 책 속에 댄디 보이,고도방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