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간 고등어
조성두 지음 / 일곱날의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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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버지 최서봉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자식과의 약속도 어쩌면 그런 이유로 그가 소학골을 포함 교우촌 다섯 마을과 오랜 거래가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믿음에 관한 부분은 묵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또한 원이에게 더는 육십 리를 왕복하지 않고 이곳에 오면 자신이 묵는 도천의 숙식처에 아들을 위탁했다. (-29-)

총각은 드디어 우렁각시를 품었다. 1867년 청송에 초향이가 오고 다시 14년이 지나 겨울 사건 이듬해 1881년 봄, 둘은 조용히 혼례를 치렀다. 초향 나이 스물일곱, 박춘삼은 마흔일곱 살, 당연히 초향은 산속 생활을 정리했다.돌이켜 두 사람은 자작나무 같은 조용하고 담백한 사랑을 나누었다. (-88-)

사회와 현실이라는 문제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던 요한은 기꺼이 야학을 같이했던 한때의 친구들과 만세 대열에 동참한 경우였다. 그는 결코 주동자도 아니었고 그를 따르는 신학생들도 없었다. 개신교와 달리 당시 경서의 서양인 주교단, 즉 가톨릭 조선교구는 일체의 정치참여나 현실 사회운동을 금지시켰으니까. 따라서 천주교 신학생으로 그는 겨우 단독행동이었다. (-168-)

"짙푸른 바다 위로 즐겁게 우리는 갑니다." 하던 오브라인의 재롱은 현실이 되었다. 1945년 4월 바야흐로 귀국이다. 삐에로의 노래는 자신의 태평양도 포함했다.노랫말 그대로 드디어 가족은 짙푸른 바다 위를 건너 각자의 조국을 향했다. 송이는 회한에 그득찼다. 1920년 상하이로 떠난 지 어언 25년 만이다. 요한과 함께 떠난 그때 그녀 나이 스물여덟 살.지금은 쉰세살! 당시 두 몸이 떠났는데 가족은 겨우 셋. 그런데 고작 늘어난 숫자가 나나?

결산이라는 그녀는 남편을 잃었고 귀국길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244-)

어떻게 병원으로 이송되었는지 경화이 없었다. 수리매 발톱이 나를 움켜 들고 나서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쓰러졌다. 품으로 쓰러진 임현을 받아 겨우 버티고 안았을 때 나는 그의 등에서 붉은 피를 더듬을 수 있었다.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군인의 조준사격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시급했다.기적같이 그들이 보였다. 놀랍게도 엄마와 종업원들이었다. (-316-)

소설 『산으로 간 고등어』 은 간잽이 최서봉 아들 춘삼과 옹기쟁이 땅 초향이야기로 시작한다. 1866년,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조선시대, 그 당시에 배움이 고팠던 이들은 5시간을 걸어서 글을 매우고,자신이 세상을 보는 생각을 깨치고자 한다. 양반과 선비가 판을 치는 망국 조선이 아닌, 개벽이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간잽이 아들도, 옹기쟁이 딸도 신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엄연히 신분 차별과 구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서학 문물이 종교와 지식이 들어왔지만 배척당한다. 초향이라는 여성은 송이라는 소녀로 이어졌고,이들의 삶은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할어니,증조할머니의 또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멀어 보이는 까마득한 우리의 역사가 아닌, 그들의 아픈 삶이 ,이도의 역사가 우리의 아픔이자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속절없이 죽어가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보면서, 스스로 일어서야했던 여성들은 기생이 되어야 했으며,만주로 상하이로, 미국으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지게 된다.박송이는 요한과 함께 상하이에서, 다시 이동했으며,일제시대와 대한민국의 광복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했다.이십대였던 송이는 어느덧 오십대가 된 미망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도 꺽이지않는 그 모습,인동초처럼 질긴 모습들은 박송이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며,송이도 ,1945년 광복 이후의 삶,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어야 했다. 이 소설에서, 우리 삶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며, 자유와 민족, 국가가 거져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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