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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견문록 - 세시기에 담긴 한자의 문화인류학
임형석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평점 :
예전 풍속을 보면 꼭 미친 사람이 아니더라도 머리에 꽃을 꽂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때는 아니고 특별한 행사가 열릴 때입니다. 이때 꽃을 꽂은 이유는 靈性(영성) 이 지배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미친 여자가 꽃을 꽂는 것도 그들이 靈性과 관련이 있다는 표시였을 듯합니다. 春勝(춘승) 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70-)
우리나라는 비교적 일찍 植木日(식목일) 을 정하고 시행한 나라입니다. 1946년 美軍政(미군정) 때 시작되었으니 미국 영향이 크지요.새나라에서 헐벗은 산을 푸르게 가꾸는 일은 단순한 山林錄化(산림녹화) 가 아니었습니다. 국민에게 希望(희망) 을 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산은 푸르러졌지만, 마음은 도리어 헐벗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錄化가 필요한 때가 아닐지요. (-168-)
「水月觀音」 그림은 高麗佛畵 의 대표작인데 대부분 일본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 조상의 그림을 몹시도 아끼는 그들은 優雅(우아) 하다는 칭찬에 침이 마를 지경입니다. 일본 美學(미학) 의 꿈은 '와비'와 '사비', 다름 아니라 곰삭은 발효의 맛이랍니다. 지금 일본은 수백 년의 '인스턴트화'를 거쳐 날것을 좋아하는 문화가 주류인 것 같지만 예전엔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高麗佛畵 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후나즈시(漁付壽詞), 곧 붕어 초밥이 풍기는 고약할 정도의 냄새를 감수하며 발효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때문이지 싶습니다. (-269-)
비 오는 날 부추를 썰어 넣은 韭菜餠 (구채병), 곧 '정구지 지짐' 에 막걸리가 생각나는 분이 많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이제 막 부추 씨앗을 뿌릴 때이지요. 韭菜餠 에 막걸리를 먹으려면 부추가 먹을 만큼 자라도록 달포는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性味(성미) 급한 사람 조바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습니다.(-365-)
篦麻(비마)는 아프리카 원산인 식물 '아주까리' 의 한자말입니다. 卑麻(비마)라고도 씁니다. 아주까리는 '피마자' 라고도 하는데 아주까리씨 篦麻子(비마자)를 그리 부른 것입니다. 篦, 곧 빗치개는 빗살 틈에 낀 때를 빼거나 가르마를 타는 데 쓰던 꼬챙이처럼 생긴 물건입니다. 머리를 만지는 빗치개가 이름에 들어간 까닭은 아주까리 기름 篦麻子油(비마자유) 를 머릿기름으로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아무리 고와도' 라는 노래 歌詞(가사) 도 있듯이 말입니다. (-427-)
銀河(은하)는 '은빛 강'이라는 뜻입니다. 땅에 흐르는 강이 아니라 하늘에 흐르는 갈 銀河水(은하수) 를 가리킵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하늘의 별자리는 사람이나 짐승에 많이 비기지만 은하 만큼은 예외입니다. 길게 늘어선 하늘의 강 銀河는 하늘 가득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쳐다봐서 그런지 이름도 가지가지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銀河를 河漢(하한) 이라고도 합니다. 河漢 은 黃下(황화) 와 漢水(한수) 를 아울러 부르는 말입니다. 두 강이 하늘로 올라가서 생겼다고 여긴 까닭입니다. (-527-)
錢魚(전어)는 요즘 한창 제철을 맞은 가을 물고기입니다. 錢魚는 '돈 되는 물고기' 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活魚(활어) 를 실어다 生鮮膾(생선회) 로 파는 요즘은 말이 되는 듯도 하여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지요. 허나 活魚車(활어차) 가 흔해지기 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초가을 오후,얼음도 채우지 않은 錢魚 를 가득 담은 나무 궤짝이 어시장을 가득 채우곤 했습니다. 鮮度(선도) 가 떨어지니 무치거나 구울 수 밖에 없는 천한 물고기가 錢魚 였지요. (-644-)
石榴(석류)' 는 '석류나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柘榴(자류) 또는 若榴(약류) 라고도 합니다. 여름에 피는 붉은 꽃은 초록빛 잎과 어울려 눈을 사로잡지요. 중국 송나라 사람 王安石(왕안석)은 石榴 를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무성한 푸른 덤불 사이 붉은 꽃 하나
萬綠叢中紅一點(만록총중홍일점)
마음속 봄기운 움직이니 하나로 족하네
動人春色不須多(동인춘색불수다)
紅一點(홍일점) 은 본디 石榴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중에 많은 남자 사이의 한 여자를 가리키는 비유로 쓰게 되었습니다. (-749-)
芹誠(근성) 은 '미나리를 바치는 정성'이라는 뜻입니다. 芹忱(근침) 과 같은 뜻의 말인데, 변변치 않은 선물이라는 뜻이지요. 獻曝之忱(헌폭지침), 곧 '햇볕을 바치는 정성'이라는 『열자 양주』 편의 이야기를 응용해서 나온 말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살았다. 자기는 얇은 베옷으로 僅僅(근근)이 겨울을 나지만, 남들이 따뜻한 방에서 갖옷을 입고 지내는지 몰랐다. 따뜻한 봄이 오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등에 비치는 따뜻한 볕을 모르오.내가 임금에게 따뜻한 볕을 바치면 큰 상을 주실 게요.'
같은 동네 부잣집 사람이 농부에게 말했다.
'옛날 戎菽(융숙), 枲莖(시경) ,芹(근), 萍子(평자)를 맛있다는 사람이 있었소. 마을의 부자에게 나물을 칭찬하니 부자가 맛보았는데, 나물은 바늘처럼 입을 찌르고 腹痛(복통)을 일으켰지요. 사람들이 마구 웃자 그는 크게 부끄러워했소. 당신이 이런 짝이요.' (-858-)
책 『한자 견문록』 은 2008년 2월 12일 부터 국제 신문에 연재한 한자 칼럼을 묶은 책으로서, 2008년 칼럼 제목은 '한자 세시기' 였다. 저자는 칼럼을 쓰는 시점에 시중에 나오는 신문을 훑어 보았더니,신문에 한자가 적혀 있는 신문이 거의 없었다는 것에 착안했고, 한자의 문화인류학을 다루기로 한다. 그것이 365개의 한자의 듯과 의미,유래를 담아 놓은 소주제로 이루어진 책 『한자 견문록』 이다. 이 책을 읽으면, 365개 한자와 엮여 있는 한중일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를 디테일한 곳까지 엿볼 수 있으며, 한글 신문만 보던 세대가 과거의 한자로 채워져 있는 1950~1999년까지의 신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책에는 한자 와 그 한자가 쓰여지게 된 유래까지 꼼꼼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국어 문해력을 높이려는 사람,한문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 사서오경과 같은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지금은 영어 글자 그대로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한자로 쓰여진 경우가 있다. 네덜란드가 화란타(阿蘭陀), 아란타(荷蘭陀), 하란타(荷蘭陀), 하란(荷蘭)로 쓰여지게 된 배경을 책에서 유래와 한국과 중국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을 처음 맞닥드렸을 때의 상황까지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런 것이다. 근현대사의 산물이었던 종이 신문에서, 한자가 퇴출됨으로서, 한자를 일상 속에 접할 일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들, 한국인의 문해력이 낮아지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널리 쓰여지지 않으면, 언어가 사라진다.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언어가 점차 사라지고 퇴출되고 있는 추세다. 그 당시에 쓰여진 문서나 말, 언어는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거나 보관되어 있다.그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뜻과 의미, 연관 지식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경성대학교 문과대학 중국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는 임형석 교수가 『한자 견문록』을 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