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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르는 까닭
김상량 지음 / 아침놀북 / 2023년 11월
평점 :
우리 어린 시절은 석기와 철기가 공존하는 그런 마을에서 온종일 개미처럼 쉴 새 없이 일해야만 했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아낙네들은 머리에 수건 두르고, 남정네들은 모자를 썼다.
세기적인 발명품 나일론의 등장은 이제 베틀에서 베를 짜던 우리 누나들을 도시로 내몰았다. 우리 시골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들 도시로 떠나버리고, 오지인 우리 마을은 하나둘 빈집이 늘어만 갔다. (-11-)
수중에 돈이 얼마 없기에 저녁 식사는 건너뛰어야 했지만, 다행히 아침에는 붕어빵 하나 사서 먹을 수 있는 돈은 가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얼만큼 시간이 지나자 시골의 중학교 교정에는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24-)
출발지인 송정리역 바로 다음 역이 임곡역이다. 이성부 시인의 시에 "서울에서 고향 광주에 오면서 임곡에서 바라보면 무등산이 보인다"라고 쓰인 문구가 있다.내가 지나가는 철로에서 50m 도 안되는 곳에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있다. 철로 반대편으로 아름다운 황룡강이 흐르고 저만큼 멀찌감치 얼리 적 일천 번도 훨씬 더 넘었을 가막목재가 있다. (-47-)
그러던 53년 6월 19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밖에서 조그마한 소란이 있었다. 건장하게 생긴 인민군들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친 것이다. 광주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했다. 100리 밖으로 도망치라고 해서 우리 동네까지 왔단다. 100리 밖이 우리 마을이었나 보아. 전날 비까지 와서 황룡강물이 불어났는데도 필사적으로 헤엄쳐 건너왔다고 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이승만의 포로 석방이다. (-63-)
뜬금없이 이틀 전 아내는 "내일모레가 우리 결혼 39주년이야!" 라고 푸념 섞인 소리를 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무엇을 해본 적 없는 우리였기에 금년에도 별생각 없이 그렇게 또 지나갈 심산이었다. (-110-)
그 당시 우리 마을은 거의 모든 것들이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석기와 철기가 혼재된 문명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생활이었다. 맷돌, 확독, 절구통, 연자방아,디딜방아가 주요 생필품이었으니,반쯤은 석기시대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128-)
그 당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게꾼이었다.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날라야 할 것인가. 지게를 지고 똥을 퍼서 나를 것인가. 그나마 인척이 있는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똥을 퍼서 나르는 일이었다. (-138-)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돔(Dome)을 올리도록 지시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한강종합개발사업에서 한강 내 골재와 고수부지 활용방안까지 지시했다. 그 밑 단계에서도 비전문가가 사업을 주도하는사례가 허다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전축한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은 건축 전문가 100인이 뽑은 최악의 건축물 순위 5위와 6위에 선정되었다. (-163-)
70여 년전 국민학교 시절 세계 3대 미항을 외우고 다녔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 오스트레일리라의 시드니, 이탈리아의 나폴리, 아마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나폴리는 내 마음 속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오 솔레미오, 돌아오라 쏘렌트로, 산타루치아 등을 접했다. (-200-)
2014년 외숙모께서 돌아가시고 외삼촌 홀로 남겨졌다. 시골에서,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무던히 외숙모를 힘들게 했던 외삼촌이었다. 외삼촌는 1945년생으로서, 저자 김상량님과 동년배이다. 1945년 언저리에 태어난 이들을 해방둥이 혹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라고 부른다.그들과 현재 젊은 세대의 차이는 전쟁 낌새가 보이면, 공포와 두려움메 휩싸이게 되고,재빠르게 움직인다는 점이다.작가 김상량의 시간여행 에세이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르는 까닭』은 전쟁 경험과 사람과 함께 했던 아련함과 그리움,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6남매의 막내아들이었던 저자는 형님 집에 빌붙어 하교르 다니면서 지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부모의 경제적인 힘을 빌릴 수 업섰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겨우내 기술고시에 합격하여,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해외 여해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 출장으로 해외를 다닐 수 있었다, 자신이 걸어온 시간의 발자취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지혜로운 삶,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이가 느껴지는 고민이 들어가 있었다.
플라스틱이 없었던 시대를 살아온 저자는 생필품을 자급자족해 왔던 시간이 존재한다. 맷돌, 확독, 절구통, 연자방아,디딜방아,이 다섯가지 도구는 집에서, 농사를 짓고 남은 부산물을 활용하여,생필품을 만들수 있엇던 생활도구다. 벼농사를 짓고 남은 볏짚으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런 경험들이 77세가 된 저자가 걸어온 인생 그 자체다.살아간다는 것,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 침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 ,이념논쟁으로 인해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지금은 비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그때 당시에는 침묵이 최선이었다.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었던 당시,미군정의 물자에 의존해왔던 시간을 지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 시대를 지나왔을 것이다.
1990년대 비로소 김영삼,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일흔이 넘은 시간의 나이테가 켜켜히 묻어나 있엇으며,지금은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때엔 가능했다는 것, 그것을 주워담을 수 있어서 고무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앞으로 일흔이 될 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미래의 아이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이며 생소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