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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ㅣ 투명 시인선 1
최진영 지음 / 투명 / 2023년 9월
평점 :
적막한 밤에
당신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대가 아닌 그대로를
어쩌면 나는 그날 밤
처음 봤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밤은 늘 길었고
그대의 밤은 늘 짧아서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습니다.
당신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물 흘리는 법 잊은 게 아니라
소리 내 울지 않는 법 배우셨단 걸. (-9-)
지하철
반대편 선로에
지하철이 지나간다.
죽는 순간의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상영되는
영화필름처럼
내 삶도
그대들의 삶도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
무수히 많은 삶
제대로 보아줄 틈도 없이 (-43-)
노인
며칠 째 면회 한번 오지 않는 노인이
6인실 제일 구석진 침대 위에
호로 앉아 병원 밤을 먹는다.
자식들과 등을 져 익숙해진 식사
그는 늘 이렇게 밥을 먹는다고 했다.
여럿이 먹는 식사는 오랜만이라며
합석해서 좋다는 노인의 말
잘 씹지 못해서 삼켜 버리는 음식처럼
외로움 마저 그렇게 소화했던가
이젠 그것마저 힘들어졌는지
밥을 무에 말아 훌훌 마셔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먹는
노인의 입에서
밥알이 눈처럼
내리는 소리가 난다
노인의 몸에서
눈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들린다. (-80-)
우리의 인생은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간다.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인생이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기차역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이유도 그러하다. 살아 생전 함께 하다가, 혼자가 될 때, 우리는 갑작스러운 두려움과 공포,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서 견디는 것이며, 각자 주어진 가치관과 신념에 다라서 살아가며, 살아가는 와중에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다. 시집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존재를, 시간을 ,경험을 담아내고 있었으며,누군가의 삶의 편린들이 하나의 시에 담아 있다.
시인의 역할은 그렇다. 관찰하고, 깊게 관찰하면서,인간의 삶을 디테일하게 바라보고, 시에 영혼을 불어 일으킨다. 시 단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다루기 때문에, 매우 까다롭고, 때로는 예민했다. 노인이 혼자가 된다는 것은, 먹는 모습에서 그대로 노출될 수 있었다.외로움과 고독함을 숨기기 위해서, 그 순간의 시간을 지워 버린다. 밥 먹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과거 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항상 외톨이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것을 잘 말하지 못했다. 평생 가난함 삶을 견디면서, 종속된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모습이 할아버지의 몸 속 곳곳에 배여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졌지만, 할아버지의 고집과 몸에 남아 있는 습관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시인은 그러한 모습을 시로 투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