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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음식
이상은 지음 / 출판사 결 / 2023년 10월
평점 :
술기운이 오른 나는 난데없이 선화에게 행복을 말했다. 선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술기운으로 착각한 줄 알았으나 선화가 나에게 잦은 연락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7-)
선아!
강신애 씨 보호자 되세요?
선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모두가 시름을 던 표정을 했다.당시에 그들은 그러지 않는 척 하며 선을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두 발로 잘 서 있는 선을 보며 생각보다 양호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몇몇은 '아...저래서' 라는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부끄러움이 마음 속에 일었다. 선은 그런 시선을 어영부영 흡수하며,강신애의 옆 의자에 앉았다. (-33-)
신애는 확실히 선이 어떤 병에 걸려서 이 지경이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 같았다. 잦은 염색으로 얇고 건조해진 신애의 어리칼 사이사이로 선풍기 바람이 통과했다. 신애는 허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 (-40-)
연애를 하는 동안 인아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자에겐 명백히 손해라고 자주 말하는 인아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려웠다. 그런 인아가 어느 날 서점에서 같이 구경하다 덤덤한 말투로 '우리방 하나로 서배로 써야겠지?' 라고 말한 건 내게 산뜻한 충격이었다.'우리가 만약 같이 살면'이라는 가정법도 하지 않고 이미 확정된 어법으로 물었다. 마치 살 집을 계약하고 남는 방이 하나 있어 무슨 용도로 쓸지 고민하는 예비 부부처럼 말이다. (-88-)
학교에는 작업실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물론 전자가 훨씬 소수였다. 그리고 작업실의 유무는 선택이라기보단 팔자에 가까웠고, 그 팔자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 같은 집안 형편이었다.나도 물론 작업실이 없었고, 그게 내 팔자였다. (-108-)
그해 겨울 또 한 번 알 수 없는 조합의 숫자가 전화기를 울렸다. 최재를 기다리던 습관대로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별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었고,최재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러다 최재가 내뱉은 말은, 곧 이사를 간다고 했다. 저 바닥 아래서 내 마음을 누군가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술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는데, 마음 그대로 전화기를 붙잡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147-)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또 이 질문,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못 이기는 척 나온 소개자리에서 남자가 여느 사람들처럼 MBTI 를 물어봤다. 이 유행은 대체 언제 끝날까.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일단 대답했다.
ISTJ요,
현실적인 편이신가 보다. 그러면 진짜 그래요? T랑 F 랑 차이 있잖아요.만약 친구가 교통사고 났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세요? (-155-)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어진 삶에서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사람을 견디고, 관계를 견디고, 시간을 견딘 다음 팔자, 운명에 따라서,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감정, 느낌, 생각은 그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기질과 성격을 찾아내 패턴을 만들어 낸다.이러한 과정들은 결국 잘살아가기 위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사람을 이해하고, 관찰하고, 그 안에서 사람의 심리를 엿보는 이유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팔자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 운명 속에 사랑이 숨어 있다. 팔자와 운명도 있었다. 작가 이상은의 『남은 음식』에는 여섯 가지 단편 소설이 소개되고 있었다. 여섯가지 단편에 여섯가지 이야기가 나와 있었으며, 각각 다른 사랑이 등장한다. 맨정신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언젠가 타이밍이 맞다면 속마음을 언급할 때가 있다. 용기를 내어서 꺼낸 말에 대해 반응이 좋으면,앞으로 나아가며, 나쁘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소설에서,사랑이 시작될 때와 사랑이 끝날 때의 시점이 언제인지 힌트를 알 수 있다. 관심이 이어질 때, 사랑이 만들어질 수 있다. 사랑은 이성 간에 , 단 하나의 형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사랑이 존재한다.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만, 다른 타인에 비해 더 가까워지며, 서로를 지켜준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사랑으로 해결하 수 있다. 내 목숨을 사랑을 위해서,과감히 던질 수 있는 이유다. 소설가 이상은이 여섯가지 이야기에서,등장하는 인물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으며,사회적 메시지도 담아내고 있었다. 억압과 부조리,착각, 이러한 것들 속에서, 어떻게든 긍정이라는 틈새를 만들고자 하였던 작가의 마음, 내가 감내해야 할 몫과 타인이 감내해야 할 몫은 어디까지인지, 보이지 않고,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그 기준을 소설 『남은 음식』에서 읽어 보았다. 작가 이상은은 여섯 단편 중에서, 두번째 단편 소설 「남은 음식」 을 메인 타이틀로 만든 이유는 작가의 인생과 가치관과 밀접하였고, 독자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