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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픽션 ㅣ 걷는사람 소설집 11
최지애 지음 / 걷는사람 / 2023년 8월
평점 :
정인이 낳은 아이이니 당연했다. 제 부모 대신 내가 업고 키운 아이. 내 쪼그라든 젖가슴을 만지며 잠자리에 드는 아이. 등에 업혀 양발을 내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 두고 발이 없어졌다며 좋아하는 아이.아이가 양팔로 목을 감싸 안을 때 순간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는 듯 했었다. 그 따듯한 무게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던 날도 있었다. (-29-)
헛.다.리. 또 착각한 모양이었다.나는 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성에 대한 호의를 구분하지 못했다. 모르는 남자와의 소개팅 때는 더더욱 그랬다. 도통 감을 잡기 어려웠다. 언제나 그 점이 소개팅 실패의 결정타였다. 뭐가 싫다,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든다, 트집 잡기는 잘하면서도 만남을 인연으로 이어가는 제주도 매력도 하다못해 인내도 없었다. (-73-)
사람이 살고 있으나 서류상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이집에는 베트남 부부와 그들의 어린 아기가 살고 있었다. 불법 체류라 전입 신고를 하지 않은 거였다. 원래 집주인과 어렵게 연락이 닿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그는 자신이 부도가 나서 돈이 없다고 했다. 나보고 대신 그들의 보증금 삼백 만원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 제가요?그럴 순 없죠.한숨을 깊게 내쉬며 그는 나보고 진짜 인정머리가 없다고 했다. (-135-)
일분 사십 초 가량의 마지막 통화까지,우리가 사용한 휴대전화 요금은 무료였다. 사랑을 경제적으로 속삭이기 위한 실속 요금제는 커플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조속히 해지되었다. 숱한 밤 미래를 꿈꾸며 나눴던 달콤한 약속도, 이불 속에서 몰래 숨족여 흘렸던 은밀한 웃음도, 휴대전화가 뜨겁게 달궈지도록 계속되던 가슴 떨림마저도 커플 요금제와 함께 해지되거나 삭제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192-)
구석에 놓인, 태어나서 처음 선물로 받은 나의 책에 손을 뻗었다. 은주가 곁에 있어 한동안 잊고 지낼수 있었던, 땅꼬마라 불리는 겁 많은 작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 엄마가 돌아오지 않던, 끝내 아침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면 이불에 들어가 읽고 또 읽다 까마귀 소리를 흉내내며 잠들곤 했던 나의 이야기.나는 책을 당겨 가슴에 끌어안고 누렇게 바랸 책자을 넘겼다. 그리고 또박 또박 글을 읽어 내려갔다. (-272-)
걷는 사람 소설집 11- 최지애 『달콤한 픽션』 에는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었다. 「소설가 중섭의 하루」,「러브 앤 캐시」,「달용이의 외출」,「까마귀 소년」 다.소설의 독특한 점은 우리 일상 속의 평범한 모습을 속에서, 성찰과 통찰을 끌어낸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매번 판단하고,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들을 돌아보고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우선 선택함으로서, 후회하게 되고,원망하게 된다. 지혜롭지 못한,어리석은 자아의 흔적이 기록될 때가 있다.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것에 별 다섯개를 남기고,추천사를 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쓸 때가 있다. 문제는 그 별 다섯 개가 별 하나가 될 때, 달콤한 픽션이 아닌 씁쓸한 픽션이 되고 만다. 알면서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달콤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상상의 경과가 씁쓸한 기억이 될 때가 있다. 작가는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날카롭게 언급하고 있었다. 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완성된 「소설가 중섭의 하루」 를 세번 완독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그 이유에 대해서,내가 이해하고, 기억을 통해 스스로 거듭날 수 있다.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것에는 나의 판단이 들어가 있고,나의 숨어있는 꿈도 들어가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작가 최지애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2014년에 나온 「달콤한 픽션」 은 계간 《아시아》 수상자이며, 저자의 문학적 깊이와 현재적 감각으로 채워지는 앤솔로지가 느껴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 가족, 사랑,돈,믿음과 기억에 대해서, 상실된 존재가치들을 회복해 볼 수 있다. 세상이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나 스스로 서로에게 친절을 배풀어야 하는 이유를 물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