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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시대 ㅣ 명청 교체기 사대부 연구 1
자오위안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명대는 늘 '정치적'죽음이 있었지만, 명나라가 망할 무렵에 나타난 무수한 죽음은 숭정제의 죽음으로 그 막이 올랐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죽음이 비록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죽음을 유발한 직접적인 요인도 아니고 그걸 장려한 것도 아니었지만 도의적으로 계도하고 자극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시범이자 훈계였고, 군주가 신하에게 내린 최후의 명령이기도 했다."군주가 죽었으니 함께 죽는 것"이 한동안 사대부들이 인정한 도덕적 율령이었다. (-71-)
절조를 지킨다는 것은 죽어야 할 바를 지킨다는 것이다.마땅한 때가 이르면 차분하게 도를 따르되 때를 놓치고 유약하게 망설여서도 안 되며 때에 앞서서 용기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니면 죽음을 결행하지 않고, 적절한 때와 장소를 만나면 피하지 않는다.마치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날이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어 쉬는 것과 같다. (-151-)
이왕조가 설립되었을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시세를 만나 재상 자리까지 올라간 이들은 대부분 황하 이북 사람들이었고, 우리 동남쪽 사람들 가운데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들어선 이들은 선후로 탁월하게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 천적이 남아 있는 이들은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238-)
공자께서는 올바름으로 원망에 부답하되 무도한 이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에 그치는 것일 뿐 군자의 중용이 아니라고 하셨다. 만약 우리나라와 예나라의 군주들 가운데 한 명이 양보하고 한 명은 양보하지 않았는데 문왕이 그것을 허락했다면,이는 혼란을 조장하고 겁탈을 시행하는 것이다. (-283-)
누구는 힘들여 들에서 농사를 지어야 마땅하고 누구는 편안히 집에서 늘려야 마땅한가? 단지 요해으로 재산이 있느냐 아니면 불행히도 재산이 없느냐 하느 사실 때문에 힘들여 일하느 이는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히 노는 이는 마음껏 즐긴다면 이것이 도의에 맞는 것인가? 하물며 은덕이 반드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누리기만 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347-)
제후를 봉하는 것이 지나쳐서 7개국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한 고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 성조의 천하는 태조가 준 것인데, 한쪽은 성공하고 한쪽은 실패했다. 성조의 지혜와 용맹은 왕비에 견줘 10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건대 성공과 실패로 왕실을 칭송하거나 허물을 탓해서는 안 된다. (-407-)
재상은 일을 시행하는 사람이고, 대간은 말을 시행하는 사람이다. 일은 오히려 황제의 뜻에 막혀서 시행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말은 방해받아 간언하지 못할 때가 없다. 말이 행해지면 뜻은 이미 행해지게 되고, 혹시 말이 시행되지 못하더라도 발언한 이치 만은 천지와 고금의 역사에서 홀로 돌아다닐 것이니, 뉘라도 그것을 막을수 있겠는가! (-449-)
청나라 초기 문자옥의 그늘 아래 있던 언론 환경에 대한 서술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흥미로운 것은 직접 경험한 이들의 서술, 즉 그 시대와 생존 환경에 대한 사대부들의 직접적인 서술이다. 청나라 초기에 문자옥이 엄밀하기 때문에 이런 서술은 단편적이고 잡다할 수밖에 없고, 그 사이에는 당연히 당사자가 기피하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국의 금훼 및 보존, 재앙을 두려워한 출판업자의 삭제와 같은 일도 피하기 어려웠을 터다. 하지만 바로 이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자료들은 특별한 문헌적 가치를 지닌다.
필자는 우선 북방 유민 부산의 서술들에 주목했다. 그의 「서 『산해경』 후 」 는 『장자』 와 같은 방식의 지혜를 운용하여 말이 재앙의 씨앗 임을 우언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당시로서는 특별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524-)
자오위안의 『증오의 시대』 는 명청 교체기 사대부 연구 로 쓰여진 책으로서, 증오가 들끓었던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 초기의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역사의 정권 교체기가 되면, 앞선 나라의 사상이나 이념, 문화와 전통들이 무너질 수 있다. 금서로 지정되거나 분서갱유로 인해 , 국가와 무관한 책들을 불태워 버리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 문자의 옥이 나오고 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문자의 옥이 시행되었듯, 명나라 주원장 대는 불온 서적을 쓴 지식인의 경우 10족이 죽어 나갔다. 한족이 지배하는 명나라가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나라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로 이어지고 있었으며,지식인이 탄압받게 된다. 특히 건문제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명나라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 은 양락제의 의해 끌어내려지고 만다. 이 책을 읽는다면, 청나라가 추구한 지식인 탄압의 실체를 그 시대에 맞게 읽어볼 수 있었다. 문자 하나 청나라의 정책이나 사상에 벗어나면, 삭제되거나 지워져야 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한 관련 사상이 남한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탄압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 당시 명나라 사대부 지식인은 두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스스로 유민이 되거나, 청나라 체제 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고,청나라에 협조하거나 그들의 원하는 사상이나 노선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명나라 주원장이 10족을 멸하였던 것과 달리,청나라 태조 이후, 청나라는 명나라의 제도나 사상을 일정 부분 받아들였고,그 과정에서, 청나라가 유교 국가이면서, 과거제도를 시행한 것을 보면, 당근과 채찍으로 청나라를 다스렸고,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다. 특히 명나라 사대부는 유교 사상을 중용하였고, 나라가 망국이 된 이후에도, 선비로서 체톤ㅇ을 지키기 위해서,공자사상에 다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기도 했다.이처럼, 명청 교체기의 증오 와 혐오, 피바람이 불고 있을 때,지식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다라서, 나라가 흥하거마, 멸망할 가능성은 더 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