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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아지는 것들
가재산 지음 / 작가와비평 / 2023년 8월
평점 :
분노와 미움과 갈등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에 오늘도 이해하고 공감하고 긍정하려 애를 씁니다.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글쿠나 글쿠나! 하면서
주문 외듯 글쿠나 하는 독백에
내 마음이 어느새 평화로워집니다.
마음에 평화를 얻으니 모두가 사랑이요,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
하루하루가 금싸라기입니다.(-36-)
얼마전 인천 계양산 밑에 그리던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 서재 겸 사무실로 꾸몄다. 40여 년간 모은 5천여 권의 책들을 서가에 가지런히 정리했다.시력이 나빠져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서가에 꽂힌 책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책은 만져만 보아도 반은 읽은 것이다'라는 말을 믿는다. 그 많은 책 중에 제일 아끼는 책 한 권이 서가에 꽂혀 있다.제목은 『오사카에서 부산에』 라는 책이다. (-63-)
반복되는 행위들은 뭔가를 닳게 한다.오래된 사찰의 목재로 된 일주문의 문턱은 긴 세월 동안 밟히고 닳아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다. 경복궁이나 경주의 도로 된 보도도 반질반질하다. 누대에 걸쳐 사람들의 소소한 발자국으로 인해 다난한 돌조차 닳는다.
일상생활 가까운 곳에 있는 용품들도 알게 모르게 모두 닳는다. 구두, 연필, 지우개, 각종기기와 건전지, 자동차 타이어 등등. 이러한 물건들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들이 닳는다는 것은 그저 마모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닳는 덕분에 일상의 삶이 채워지고 새로움이 생긴다.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111-)
이재는 외국어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학공부 부담도 줄어든다. 번역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어 300쪽에 달하는 책 한 권의 번역도 순식간에 끝난다. 게다가 찍기만 해도 외국어가 문서로 저장되고 이를 번역기에 돌리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 번역 품질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하며 104가지 종류의 언어로 짧은 글은 순식간에 번역을 해준다. (-198-)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내게 그런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게 가르침을 주신 무수히 많은 선생님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멀리 외지에서 부임해 오셔서 담임을 맡으셨던 이인기 선생님이다.그 담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충남 태안 해안가에서 8남매 중 남자 막내로 태어났다. 농촌에서 자란 내 또래 세대라면 대부분 교육의 혜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전쟁의 폐허로 어릴 적 농촌 모습은 선진국 대열에 선 지금과는 너무 달랐다. 소위 말하는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라고 할까. 당시를 되돌아보면 어릴 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297-)
살다보면 닳아지는 것이 도처에 있었다. 사람의 기억이 닳아지고 내가 밟고 있는 돌, 나무, 흙 조차도 닳아지고 있었다.세월의 때를 품고 있었던 자연의 흔적들은 새로운 것에서, 낡은 것으로 서서히 닳아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닳아지지 않는 유일한 것이 있었으니, 사람마다 품고 있는 고유의 성격과 고집이다. 죽을 때까지 꺽지 않은 나만의 고집이 내 삶을 후회로 떡칠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그리하여, 일흔이 넘은 작가 가재산의 에세이집 『닳아지는 것들』은 내 삶의 유연함과 포용을 강조하고 있었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스스로 닳아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내 삶의 기록의 편린들을 일기장이나 메모장,나만의 가상 공간에 적음으로서, 스스로 선택한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들을 덜어내고, 내삶을 평온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같은 분노와 증오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스스로 감내할 줄 알고,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다.어떤 상황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스스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생의 변화를 주도적으올 만들수 있다.현대인들에게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훈련이나 연습이 전무한 상태에서,스스로 그릇된 선택과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내 삶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냐,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서,의미있게 닳아지는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 앞에 당면한 단 하나의 진실,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좋은 대학을 나왔든, 좋은 직장을 나왔든,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임종 후 장례식을 치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여기서 죽음 이후의 장례식이 아닌 살아 생전의 장례식이 소개되고 있었다. 말그대로 웰다잉을 실천하는 것이며, 기쁜 마음으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색다름과 의미있는 삶을 생전에 설계할 수 있고, 경조사에 있어서, 겉치례에 의존해 왔던 우리의 살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삶의 마지막 조차도 타인의 손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내 인생에 닳아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