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과 영혼 - 영도零度의 인문학과 공부의 미래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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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은 속물의 도구다. 속물들은 예법을 윤리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절의 목적은 까다로운 상류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설령 이것이 예절의 목적이고 속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 역사적으로 예절은 사생활 개념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 사생활개념이 개인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36-)

널리 알려진 대로 종교(religion)의 라틴어 어원은 '다시 묶는다.(re-ligare)'이며 , 인간의 눈이 지닌 문명문화사적 의의를 새겨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눈(시선) 을 묶는다는 것이다. 실로 묶음(규율) 혹은 지계(持戒) 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가 드러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문(人紋)의 형식이다. 한 곳이 묶이면 다른 곳이 (더) 풀리는 게 인문의 이치이기 때문이며, 사람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유기적으로 일체를 이루는 존재는 이런 상보적 보상의 장치를 활용하도록 진화하고 적응하게 마련이다. (-112-)

전술했듯이 집중은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프로이트와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를 거친 현대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노라면 무적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차마 '기적'이라 불릴 만도 하다. 실없는 상념과 변덕들이 사방에서 콩 볶듯이 날뛰는 판국이니 비록 잠시라도 하나로 일관할 수 있는 게 그 자체로 중요한 능력이자 미덕이다. (-197-)

내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용어 중 하나로 '내 것이 아닌 자신감'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감이라는 게 말 그대로 나 자신에 처한 감정이니 일견 형용모순일 듯하지만, 바로 이 모순의 자리에 틈을 얻어 예상치 못한 기별을 알리는 게 인간의 정신이라는 기묘한 매체다. 나 자신의 경우도 이 용어의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이 용어를 구상하거나 떠올리고 강화하게 만든 경험의 상당 부분은 대학 안팎에서 행한 강의/강연과 관련된다. (-261-)

내가 오규 소라이를 탁월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중국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적어도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 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일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은 마치 콜럽버스의 달걀 같은 거지요. (마루야마 /가토 2003.31)(-343-)

그러므로 집중하는 사람이 집주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의 집중이 얹힌 생활양식은 어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의 집중이 이웃과 세상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등속의 문제가 다시 '문제' 가 된다. 이런 뜻에서 집중은 문제의 해결이라기 보다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발굴에 가깝다. 그러므로 집중은 정신의 영도라는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얻는 어떤 '본질' 로 이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여건과 매체의 조건에 얹혀 점진적으로 개량되는 극히 인간적인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선 집중이라는 행위는 , 베유가 '완전히 순수한 집중'을 요구했던 것처럼 그 강도(Intensity) 가 중요하다. 공중에 있다고 해도 추락은 이미 비상이 아니듯, 엄벙덤벙, 데면데면하다면 이미 그것은 집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411-)

세계 최고의 성매매 국가이면서도 기이하게 몸을 꼬고 사리는 한국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치마와 자전거를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일까? 별 이유 없이 거대한 포식자로 살아가고 있는 미국은 치마든 무엇이든 아예 자전거를 깔아뭉갤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중국인이라면 대륙적인 대범함에다 또 사회주의적 평등을 거쳤으니 어저고저쩌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생각한 탓이었을까? (-502-)

끊어야 새 삶이 있다. 도려내야 새 살이 돋는다. 그리고 끊고 비운 자리에서야 비로소 영혼의 샘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론들이 ,제도들이, 타협이, 그리고 기도가 끊어내지 못한 자리에서 불천노의 집중은 우리 삶의 질을 일상의 낮은 자리에서부터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집중의 모방이 , 불천노의 전염이 필요한 사회다. "모방은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을 전염시키며 거기에는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581-)

나는 깨어나자마자 꿈을 기록해두었다. 아직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교회 대학부실에서 무언가 남은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교회 사무실 전화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전화 연락이 닿았다."퍼뜩 집에 오거라....큰 난리가 았다. 난리가!"알다시피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격을 받아 죽은 날이다. 복기해보면 상술한 꿈을 꾼 것은 대체로 그가 죽은 후 불과 몇 시간 사이였던 듯하다. 당시의 내가 어느 정도는 종교신비주의에 젖어 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후 오랫동안 내 혼잣속으로는 박정희의 피살을 정치적 사건이자 일종의 '종교적 사건'으로 납득했다. 물론 상술한 꿈의 영향 때문이었다. (-636-)

부탁이라는 발화수단적 행위 속에 적시된 욕망의 대상은 ,바로 그 부탁이라는 수행을 통하면서 바뀐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대상은 심적 표상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욕망을 향한 이러저러한 수행을 거치면서 덧칠되는 것이다. "대상의 분제가 아니라 주체가 타인(들),특히 대타자들과 맺는 상호작용이 요점'이라고 했지만, 이 부탁의 수행도 그저 교환(echange)이라는 수평적 거래로 마감되지 않고 일종의 연대(alliance) 에 이르기 때문이다. (-699-)

공터는 원래 시간과 장소에 제한 없이 우연히 생기기 때문에 시내 어디에 어떤 공터가 있는지는 땅으로 사기 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미리 알수 없다. 그곳을 지나면서 비로소 그 땅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공터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도시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한동안 풀이 자라던 공터에 땅이 다져지고 드디어 건축 공사가 시작되는가 싶으면 어느 새 그 옆집이 철거되고 , 어떤 때는 화재로 불탄 다른 공터가 생긴다. 그리고 한 차례 비가 오면 곧바로 잡초가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눈 깜작항 사이에 나비나 잠자리가 날아다니며 귀뚜라미가 뛰어다니는 들판이 된다. 바깥 울타리는 있으나 마나 지나는 사람들의 게다 발자국으로 좁은 길이 자유자재로 열려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밤에는 남녀의 밀회 장소가 된다. 여름에 도처의 젊은이들이 어설프게 스모대회를 열 수 있는 것도 공터가 있어서다.(-784-)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강자와 약자 중에서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혐오하게 될까?피해자가 가해자를, 그리고 넓게 보자면 약자가 그 약자와 관련되는 강자를 혐오하는 게 일견 당연하게 여겨진다. 군대의 총기 사건이나 자살 테러가 전형적이다. 한국에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 총기 사건의 경우에도 계급적 강자가 계급적 약자를 향해 실탄을 쏘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남자와 여자를 병장과 이등병이나 사자와 가젤에 맞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이등병과 병장의 관계는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견주어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하며 주로 권력의 기울기에 의해 좌우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남혐(男嫌)'이 아니고 '여혐'이 주제어가 되는 것은 아니러니하다. 강약의 이치만을 따지면 응당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자신들을 지배해온 남성을 혐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833-)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의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가. 십 수 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보자.빈민가의 군중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신의 이름으로 벌주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 떼 같았다. (-890-)

한편 철학과 인문학에서도 지식의 거리감 혹은 애매성은 이와 무사하게 작동한다. 이 경우에도 포르노와 신비주의가 있으며,메시아와 유토피아가 있다. 부주의와 태만, 어리석음과 둔감 탓에 재발하는 애매성은 의외로 잦다. 지식인들은 짐짓 '소통과 이해의 불가능성'을 나직하게 읊조리며 이 애매성을 형이상학화하려고 하지만, 정작 필요한 일은 꾸준한 청소와 정돈 정도의 노력이면 족하다. 하지만 지식의 경우에도 메시아적 소망이나 유토피아처럼 간단히 치워낼 수 없는 애매성이 나타난다. (-953-)

철학자이며, 숙명여대 교수 김영민의 철학 에세이자 철학비평서 『집중과 영혼』은 2017년에 쓰여졌으며,그가 쓴 저서 중에 1000페이지로서, 가장 두껍다. 즉 그가 생각의 사유를 『집중과 영혼』 에 집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학국어 언어를 해체하고 있었다. 인간이 추구해온 보편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바로 잡는다. 예절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그것이 왜 태동하였으며, 예절의 본질과 합목적성, 그리고 예절을 추구하게 되면 얻는 이익과 불이익을 말하고 있었다. 예절은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인간의 계급사회를 검증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속물이 만든 사회적 도구가 예절이라고 말한 대목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는 집중에 대해서,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집중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을 완전함으로 연결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은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는 일침과 연결될 수 있고, 무결함,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어떤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으, 달인이나,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추구하는 바,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상태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 가치에 휘줄리지 않고,누군가에게 유혹되지 않으며, 나만의 세계를 형성한 이들에게 갖춰질 수 있는 무형의 가치이며,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면서,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업적이나 흔적은 남는다.조선의 이순신, 피겨의 여왕 김연아와 같은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집중과 영혼』이라는 단순함과 저자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김영민 식 철학 사전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단어에 대해서 그것이 신뢰받는 국어학자에 의해 쓰여진 뜻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때가 있다.이치에 대한 탐구가 텍스트에 기록된 상태에서, 그것이 만들어진 체계와 과정을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책에 적혀 있는 혐오란 단어만 보다라도 그러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혐오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계획된 행동이나 폭력을 가할 때, 강한 자에 대해 사회적 혐오감을 표출한다. 얼마전 뉴스에 나온 부산 돌려차기 남성 가해자의 반성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 대한민국 사회는 그 남자에 대해 사회적 혐오를 표출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남자에 대해 남혐이라고 즉각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으로 고oo 전 남편 살해 사건 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건은 다르다. 여혐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라는 단어에도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한다. 관대함이라는 단어도 어어적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혐을 사회적으로 수면 위로 띄우지만, 확산되거나, 확대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계급에 대해서, 같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메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흔하게 쓴 단어의 모순과 의선에 대해서,본질적인 원인과 함께 사회적 메시지, 언어적 도구로서 이치까지 아우르고 있다. 어떤 단어가 어떤 상식이 제대로 반영되고, 정착하려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계급사회, 힘의 논리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책 『집중과 영혼』 을 읽어야 하는 목적이며,그가 생각하는 언어의 본질적인 해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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