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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2
제인도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4월
평점 :
윤조는 그날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 당황했기 때문일까? 사장 집 테이블 위에 파란 쇼핑백과 상자가 주사기, 약병과 함께 널려 있었는데. 게다가 그녀는 그걸 들고 상무의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27-)
의혹은 의혹을 낳는다. 내 의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날 대리 기사로 불렀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고의였을까? 이 일을 밝히고 싶다. 이를 입증하면 내 혐의를 벗을 수 있을 텐데. 기소유예가 취소된다면 다른 직업을 구하는 것도 좀 더 자유로워질 텐데. 여기서 굴욕적으로 버틸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이를 입증할 수가 없다.증거가 없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런 내 생각은 그저 망상에 그치는 걸까? (-48-)
"증거 자료를 남기는 겁니다.저도, 그리고 유찬 씨도 준비를 해 둬야지요. 아니길 바라지만, 유찬 씨 얘기를 들으니 전무님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회사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이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점잖게 말했지만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그의 말이 옳다.전무가 나를 내쫓기 전에 나도 방어할 무언가를 준비해둬야 한다. (-120-)
나도 사실 전무가 제일 수상하다.방영태 실장을 이 회사로 끌어들인 사람도 조규진 전무이고,그가 없어진 이후로 이익 본 사람 역시 전무다. 박영태 실장의 죽음 뒤에는 그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가 블루 블러드 회원이라는 확신이 없다.
"아니. 내가 계속 야근했잖아요.회사 증원하는 것에 대해 ,그런데 그 돈이 나올 구석이 없거든?"
"손영익 대표가 투자한 돈 있잖아?" (-207-)
점심 후,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5분쯤 여유를 즐겼을까. 갑다기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까아아악~! 그리고 웅성대며 사람들이 몰려든다. 커피르 마시고 있던 나는 호기심에 편의점 밖으로 나가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는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번져 나온 벌건 피가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옥상에서 뛰어내린 건가. 난 바닥에 쓰러진 여자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을 보고 경약하고 발았다. (-275-)
"박영태 실장님은 왜 협박하신 겁니까? 왜 죽게 만드셨어요?"
"전무님과의 뒷거래 문제로 내가 협박한 건 사실이지만, 죽음을 선택한 것은 박실장이었어요.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차에 장난친 것도 그럼 사장님이셨겠네요."
"그건 뭐...." (-368-)
내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삶에서,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의식하면서 ,인지하면서 ,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말했던 것을 다 기억할 순 없다. 하지만 과거를 복기하여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이 생겼거나, 나의 의도와 상관없는 계획된 일이 생길 때다. 유찬에게 동창 정이준의 죽음이 우연을 가장한, 바로 그런 계획된 일이었다.
이제, 유찬은 자동차 전문 기자에서, 대리기사로,대리기사에서 수행기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무관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처음 정이준이 죽었던 그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어디까지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억울함을 풀어야 했고, 기소유예된 범죄사실을 스스로 무죄라고 밝혀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들을 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무엇보다도 유찬은 내 주변에 일어나는 연속된 죽음을 견디지 못했다.차라리 유찬 스스로 죽은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같이 일했던 사람이 죽었고,사랑했던 이가 죽었고,이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기에 계획된 범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유찬에게 남아 있었다.
로비스트 윤조가 있었고, 사랑하는 민가영이 있었다. 로비스트에게 누군가를 좋아하고,사랑하는 것은 진심이 아닌 비즈니스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로비스트 윤조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칠 수 없었던 이유다. 유찬은 이제 ,자신의 과거의 디테일한 것까지 찾아내는 의무가 있었다. 증거를 찾고,힌트를 찾고,단추하나 놓칠 수 없었으며, 티끌 만한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저지른 어떤 목적들이 유찬의 주변 사람들이 죽어야만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비밀을 들추어서도 안되고,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을 살려두어서도 안된다는 걸, 유찬은 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