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 오픈 준비합니다 - 아날로그에 진심인 게임 기획자의 일상 레시피
신태주 지음, 이다 그림 / 파란의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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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게임 기획작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소양 중 하나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꼽는다. 이는 보통의 경우 프로그래머 혹은 디자이너에게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것의 형태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라고들 하지만 지금 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나를 포함한 일부 기획자에게 있어 업무 시간 중 가장 많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상대는 프로그래머도 디자이너도 아닌, 제3의 부서이기 때문이다. (-19-)

자아, 그럼 이제 뭘할까.

창밖을 한번 내다보고, 날이 좋은 것 같아 미세먼지 측정 앱을 켜보았다. 오늘은 [양호]하다.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대부분 [나쁨] 과 [매우 나쁨] 사이를 오고 가는데,이렇게 간혹 뜨는 [양호] 혹은 더 드물게 뜨는 [좋응]은 꽤나 귀하다. 모처럼 동네 산책 겸 쇼핑이나 다녀올까. 사실 쇼핑하러 돌아다닐 때 남자를 달고 다니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다. 오늘은 혼자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 싶은 게 눈에 띄면 몽땅 사 버릴 것이다.나는 마스크 안쪽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추리닝과 운동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겨울이 끝나가고 봄으로 막 접어드는,딱 이때쯤에만 느낄 수 있는 날씨가 있다.바람이 불지만 추울 때는 지났다. 경우에 비해 확실히 온기가 느껴지는 ,희미한 꽃봉오리 냄새와 약간의 흙냄새 같은 것이 섞인,봄바람니다.(-80-)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단골이던 식당하나가 또 문을 닫은 것을 보았다. 그다지 번화가도 아니고 이렇다 할 만한 유동인구가 있는 것도 아닌 외진 동네라, 바로 지난 주말에고 들러서 밥을 먹고 쇼핑을 했던 오래된 가게들이 하나둘씩 모르는 새 조용히 사라지는 것은 , 역병이 심화되던 즈음부터도 이미 종종 있던 일이었다,. 우리는 터널의 끝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 같았다. 거대한 마물은 그 이름과 모습을 몇 번이나 바뀌 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있었다.

비에 젖어 힘없이 나부끼는 '임대' 두 글자에 나는 가슴 한편이 선뜩하게 내려않는 것를 느꼈다. (-150-)

문득, 우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만 매달려 한평생을 보내는 암담한 세대임을 깨닫는다. 주식이건 코인이건 심지어는 노동의 대가로 받는 화폐마저도 , 그저 스마트폰 화면에 찍히는 몇 개의 숫자들로만 존재했다가 또 사라질 뿐.그것들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숫자들이 어디에서 오는지,그 가치가 무엇에 의해 존재하며 또 어떻게 증명되는지를.

결국은 모든 것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존재하는 일종의 커다란 허상에 불과하다.수많은 삶을 지탱하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무책임하게 바스러져 사라질 수 있는. (-203-)

1985년 생 광주 출생, 작가 신태주는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나, 게임회사에서 숫자와 디지털 데이터를 만지는 게임기획자로 일하고 있다.작가 신태주의 에세이 『서버 오픈 준비합니다』 에서는 게임 이야기보다 요리가 더 많이 등장하고 있었다. 일상 속의 소소한 소확행을 느끼는 것은 평범함 속에서,특별함을 찾아내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같은 상황에서,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어떤 사람은 그 안에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 교훈을 얻는다. 세세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반복된 일상이 남다른 지혜, 보이지 않는 숨은 통찰력을 키울 수 있다. 즉 은은함과 평범함이 이 책을 특별하게 해주고 잇으며,우리에게 미지근하지만 꼭 필요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코로나 펜데믹, 역병으로 인해 저자는 직장생활을 재택근무로 돌려야 했다.그로 인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옷을 간편하게 ,다른 사람을 신경써야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회사에 나가기 위해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으여,그시간을 활용하여,여유로운 티타임으로 바꿔 나간다. 이 책에 '아날로그에 진심인 게임기획자의 일상 레시피'라고 말하는 이유, 이 책의 매력을 상큼함과 노랑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유다.

컴퓨터 내부망 서버는 차갑다. 디지털과 컴퓨터는 차가운 속성을 지닌다.하지만 나날로그는 내 몸의 차가움을 녹여 낸다. 살다보면 불편한 일이 부지기수다. 버스에 타면, 갑질 노인이 타서,내 하루를 다 망쳐 놓을 때가 있다.그럴 때는 깔끔하게,불쾌한 기억을 비우고, 그 순간을 지우고,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삶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보내는 삶, 그 삶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일상 사속에 평화로움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 복잡하고, 분주한 삶 대신,여유로운 산책을 다녀와서,하루를 시작하고,주어진 게임 기획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는 것, 내 앞에 놓여진 여러가지 상황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삶을 견디면서, 소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는 이들에게 행복과 운이 작용한다는 걸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내 삶의 특별함을 기록하려고 애쓰기 보다,평범함을 특별하게 바꿀 수 있는 것,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며, 에세이가 가지는 아날로그적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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