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먼 지니어스 - 유럽의 세 번째 르네상스, 두 번째 과학혁명, 그리고 20세기
피터 왓슨 지음, 박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61~1962년의 아이히만 전범 재판과 1967년에 일어난 중동의 6일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단기간에) 마치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이 일아난 이후부터라고 노빅은 말한다. "이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미국 문화에는 '홀로코스트' 라 부르는 뚜렷한 현상이 등장했다. 이것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나치가 저지른 야만성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별개의 위상을 지닌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온갖 공포를 묘사하는 언어가 되었다. (-45-)

빙켈만은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를 졸랐지만 그의 집안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갖은 노력 끝에 베를린으로 간 그는 크리스티안토비아스 담 밑에서 가르침을 얻었다. 담은 "그리스어 연구가 완전히 무시당하던 시절에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중시하는, 당시 독일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빙켈만은 이어 할레 대학과 예나 대학으로 옮겨가 가정교사생활을 하면서 의학과 철학,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밤늦도록 그리스 문헌을 읽고는 낡은 코트를 입은 채 의자에 자다가 , 새벽 4시에 다시 일어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60-)

오늘날의 평가로 고전음악의 '척추'를 구성하는 인물은 바흐, 헨델,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이며, 모두가 독일인이다. 이들이 독일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세기로 전환할 무렵이었다. 1800년대를 통틀어 이들 외에 음악의 대가로서 독일인이 아닌 음악가로는 헥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차이콥스키, 베르디 정도만 꼽을 수 있다. (-248-)

1790년에서 1840년까지의 수십 년 동안은 근대 확문이 발전하며 체게를 갖춘 결정적 시기였다. 1840년에 이르러 자연과학, 물리학, 역사학, 언어가 독립된 학문 분야로 등장했고., 20세기 학문을 지배하게 될 핵심 문제를 만들어냈다. 이 말은 스티븐 터너가 1972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인 프로이센의 대학과 연구 규범, 1806~1848』에서 한 것이다. 터너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조직화된 학문의 이 영웅적 시대가 도래하는데 대부분의 유럽 학자가 기여했지만, 독일 학자들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39-)

휠덜린이 '우울한 실러" 였다면 하인리히 폰 크라이스트(1777~1811) 는 모든 극작가의 모범으로 훨덜린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프랑크푸르트인데 어오데르에서 태어난 클라이스트는 끝없는 발랑자로서 파리, 스위스, 프라하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1810년에 『베를리너 아벤트블레터 』 신문의 편집기자로 들어가면서 베를린에 정착했다. 클라이스트는 베를린에서 불안정한 보헤미안이자 화가 지망생인 헨리에테 포겔과 짧고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포겔이 클라이스트를 부추기는 바람에 두 사람은 기상천외한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클라이스트는 포츠담 부근의 클라이너 반제 호반에서 먼저 포겔을 총으로 쏘고 이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네살 때의 일이었다. (-438-)

1879년에는 베를린 무역박람회에 최초의 전철이 전시되었고, 베를린 카이저갤러리에는 최초의 전기가로등이 등장했다. 1880년에는 만하임에 최초로 전기를 이용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이어 1881년에는 세계 최초의 베를린과 라히터펠데 사이에 전차가 운행되었다. 1886년에는 최초의 무궤도전차가 등장했고,1887년에는 베를린 마우어슈트라세에 발전소가 세워졌다. 1891년에는 전기드릴이 최초로 생산되었으며 1892년에는 시간당 전류량을 측정하는 전시계가 설치되었다. 이제 지멘스라는 이름은 그가 만든 전기공학 Elektrotechnik 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531-)

우생학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은 브레슬라우에서 성장한 의사인 알프레트 플뢰츠(1860~1940) 였다. 플뢰츠의 『독일 인종의 유용성과 약자 보호』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빈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히틀러도 읽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면 플뢰츠가 주장하는 방향의 한 자락을 알 수 있다. (-632-)

마침내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여파로 프로이센이 독일 국가의 연합을 주도하면서 베를린은 신흥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베를린은 훗날 자신이 과시하게 될 수도로서의 면모는 아직 갖추지 못했다. 어쨌든 베를린에서는 대대적인 승리를 축하하는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다. 1871년 6월 16일 일요일,해가 쨍쨍 비치는 가운데 철십자 훈장을 단 4만 명의 병사들은 템펠호프 들판을 출발해 브란덴부르크 문을 거쳐 운터 덴 린덴 거리의 왕궁까지 행진했다. 전투에서 노획한 프랑스 군의 깃발 81개는 거의 누더기가 된 채 독일의 승리를 돋보이게 했다. (-755-)

정신분석 연구소와 바르부르크 연구소, 독일정치연구소,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모두 피터 케이가 말한 '이성 공동체' 의 일부로서 그들 공동의 문제와 경험에 과학적 합리성의 밝은 빛을 비추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가 냉정한 합리성이 답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에서 과학의 "냉정한 실증주의" 에 반발한 운동 중 하나는 "신비로운 독일의 왕" 슈테판 게오르게를 중심으로 일파를 형성한 시인과 작가들이 주도했다. (-830-)

이런 모든 수법은 대학을 길들이는 정책에 포함되었다.가장 큰 관심 속에 많은 논란을 야기한 인물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였다. 특히 한나 아렌트와 관계나 그가 아렌트에 취한 태도는 악명 높었다. 한나 아렌트(1906~1975) 는 1924년 18세에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가 유럽에서 생존한 철학자로서는 가장 유명하다는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으며 철학을 공부했다. 하이데거의 대표적 저서인 『존재와 시간』이 완성 단계에 있었을 무렵으로, 이 책은 3년 후에 나오게 된다.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처음 만났을 때 하이데거는 35세였고,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둔 유부남이었다. (-939-)

아렌트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저작활동에 매달렸고 1951년에 나온 『전체주의의 기원』은 미국 독자층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동시에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라고 할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고, 무엇보다 어떻게 유대인 같은 소집단이 나치운동이나 세계대전, 죽음의 공장 같은 참혹한 역사의 기폭제가 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아렌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두 이념 모두 ,비록 계급차를 타파해 인류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제기한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결국 계급의 세분화와 소외, 집 없은 상황을 불러왔다고 주장했으며, 대중사회의 핵심은 "인간공동체의 고급화된 형식"을 만드는 대신 고립과 고독을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1039-)

독일서적상협회의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하버마스는 9.11 테러가 일어난 지 한 달 쯤 지난 2001년 10월에 종교적 근본주의와 나치즘 사이에 유사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나 '야만인'을 탓할 게 아니라 그들 모두 현대화의 '열매' 이며 계몽주의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129-)

자크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은 카를 마르크스만큼 혼란을 초래한 것은 아니지만 결코 비중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이트의 유산을 평가하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프로이트 한 사람이 정신분석학으로 인간의 전 생애에 영향을 주는 특수한 방법을 개발했다고 보는 관점이자. 다른 관점은 프로이트와 함께 그의 동시대인 니체와 막스 베버를 묶어서 보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이 두가지 관점을 모두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독일 사상가 집단의 완전한 성과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1182-)

21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 주도의 글로벌 세계관이며, 유대인이 세계 경제 문화 패권을 쥐고 있다. 20세기 초 1933년 이전까지 미국이 주도한 세계가 아닌, 독일이 주도하는 세계였다. 1871년 프랑스와 전쟁 이후, 통일된 독일 제국이 탄생한 프로이센 제국은 서사히 제국주의로 변모하는 준비를 갖추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개최될 당시만 해도, 유대인보다는 아리아인이 세계를 운영하는 유리한 상황,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때 18세기부터 20세기 히틀러, 한나아렌트가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독일은 서서히 영국이 가지고 있는 권려과 힘을 양분하였다. 유럽은 영국, 독일,프랑스, 이탈리아가 이념에 따라서, 사상에 따라서, 자기 몫을 챙기는 형국이었다.여기서 주도권을 쥐는 나라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독일의 지니어스들을 보면, 경제 뿐만 아니라, 음악,예술, 정치까지 이우르고 있었다. 어디 한 곳에 치우쳐 있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달리, 독일은 다른 횡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칼 막스가 독일 출신이며, 칸트, 니체, 헤겔,후설과 같은 철학자가 독일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핵심코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저먼 지니어스'였기에 가능한 정해진 조건과 유리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미국은 그 때 당시 남북 전쟁으로 인해, 흑인해방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질학 하면 베게너가 등장하고, 판게아 이론이 나타나면서, 6대륙이 하나의 큰 대륙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다윈의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무의식에 대해서 ,정신병리학을 연구하였던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제자이자이며. 프로이트와 각을 세웠던 구스타프 융도 독일사람이다. 학문의 중심은 영국이 아닌 독일에 있었으며, 19세기 말, 영국은 케임브리지 ,옥스포드 대학교가 있었다면, 그 당시 독일은 수십개의 유럽사회와 네트워크 되어 있는 유명한 대학교가 있으며, 학문의 요람이 독일에 있었다. 근대 산업 디자인의 효시 바우하우스 가 독일에서 생겨난 것도 우연이 아니며,음악의 선구자 바흐, 헨델,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또한 독일인이었다. 즉 그들의 독일이 가진 강력한 힘이 독일이 유럽을 재패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계산이 깔려 있었으며, 히틀러는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유대인 혐오를 부추겨서 ,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인이 되고 있다. 반도 국가인 한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 있었던 반면,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쥐고자 하였던 이유도 그러하다. 대한민국이 6.25 전쟁 이후 , 해방이 되면서, 독일의 산업 인프라를 모범으로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한다면, 한국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이히만 전범재판에서, 악의 평범성을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먹스 베버와 자크문트 프로이트를 독일의 자랑으로 여기며,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전체주의가 있었던 나라 독일은 나치,홀로코스트로 인해 미국이 패권을 가짐으로서, 독일은 야만 국가, 파시즘 국가가 되고 만다, 독일에 대한 선입견, 편견이 생기게 된다. 즉 독일이 패자이고, 미국이 승자이기 때문에, 미국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독일 또한 미국 못지 않은 지니어스 ,우수한 인재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생학, 아리아인에 대한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독일을 하나로 모으면서, 파시즘을 독일사회에 심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독일이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상황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