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 평전
셰시장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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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쓰순 (1893~1966) : 맏딸 ,시사 연구 전문가

량쓰청(1901~1972) : 맏아들,저명 건축학자. 1948년 3월 중앙연구원 .인문학 분야 제1기 원사로 뽑힘.아내가 바로 문학가 린후이인 임.

량쓰융(1904~1954) : 둘째 아들. 저명한 고고학자. 1948년 3월 중앙연구원 인문학 분야 제1기 원사로 뽑힘.

량쓰중(1907~1932) : 셋째 아들. 국민당 제19로군 포병장교 역임. 병으로 죽음.

량쓰좡 (1908~1986): 둘째 딸. 저명한 도서관학자.

량쓰다(1912~2001) :넷째 아들. 장기간 경제학 연구에 종사.

량쓰이(1914~1988) :셋째 딸. 사회활동에 종사.

량쓰닝(1916~2006) :넷째 딸. 신사군에 투신해 중국 혁ㅁ여에 참가.

량쓰리(1924~):다섯 째 아들. 로켓 통제 시스템 전문가. 1993년 중국과 학원 원사로 선임, (-51-)

물론 이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당시 캉유웨이가 관직사회 및 사대부 사이에서 엄청난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캉유웨이는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오만했다.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 하기를 좋아하고 고집이 세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를 경원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캉유웨이는 또 사상 측면에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그에게 호응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세속 사람들과 전통을 옹호하는 수구파 인사들은 더더욱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162-)

큰 형님[캉유웨이] 께서는 일의 규모를 지나치게 크게 벌이고, 기상이 지나치게 예리하고, 담당하는 일이 지나치게 많고, 동지는 지나치게 적은 데 비해 거사 추진은 지나치게 관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형님을 배척하는 자, 시기하는 자, 밀어내는 자, 비방하는 자가 거리에 가득한 상황에서 황상께서는 실권이 없으시니 어찌 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22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캉유웨이는 줄곧 청 황제를 복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다만 군벌들의 신의를 지나치리만치 쉽게 믿었을 뿐이다. 그는 쉬저우회의 결과 이미 위안스카이를 타도했으므로 북양군벌을 수습하려는 목적을 이루었다고 보았다.그러나 황제 복위가 어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캉유웨이는 이 북양 군인들이 일찍부터 조변석개하는 정치적 술수에 익숙한 자들임을 전혀 몰랐다. 이처럼 목적이 서로 판이한 회의에서 결정한 약속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캉유웨이는 오히려 그들이 파놓은 함정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326-)

쩡롄은 심지어 황제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참수하여 사특한 언론의 길을 막으십시오., 그런 연후에야 천하 인심이 저절로 고요해 지고 국가도 저절로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술변법 2) (-446-)

량치차오는 신문을 일인 신문, 일당 신문, 일국 신문, 세계 신문으로 나눈 뒤 이렇게 설명했다. "일인 혹은 한 회사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일인 신문이다. 일당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일당 신문이다. 국민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은 신문은 일국 신문이다. 전 세계 인류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신문은 세계 신문이다.중국에는 옛날 일인 신문은 있었지만 일당 신문, 일국 신문, 세계 신문은 없었다. 일본에는 오늘날 일인 신문, 일당 신문, 일국 신문은 있지만 세계 신문은 없다. 이전의 『시무보 』 와 『지신보 』를 예로 들자면 아마도 일인 신문의 범위를 벗어나 일당 신문의 범위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540-)

쑨 선생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가. 이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그에게 탄복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의지가 굳건해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좌절한 적이 없다. 둘째, 일처리가 기민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 특히 군중 심리를 가장 정확하게 관찰하고 가장 적절하게 운용했다. 셋째, 몸가짐이 청렴결백하여 최소한 -혹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돈을 함부로 벌려 하지 않았고, 돈을 벌 때도 절대 개인 목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602-)

"첫째, 국민이 정치를 경시하지 않고 항상 자기 임무로 삼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상식을 갖게 해야 한다. 셋째, 국민에게 정치적 능력을 갖게 하여 항상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 요충을 지키게 해야 한다. 대저 국민이 이 세가지 자격을 갖춘 연후에야 입헌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 반드시 입헌정치를 건립한 연후에야 국민의 이 세가지 자격이 발전할 수 있다. 국민의 수준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앉아서 그 수준이 높아지길 기다린 연후에 입헌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망령된 생각이다. 그러나 입헌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국민의 수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일 또한 망령된 짓이다." 그럼 국민의 정치 소양은 어떻게 하면 높아지고, 또 이일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716-)

량치차오는 마음을 모두 터어놓는다는 어투로 위안스카이에게 권유하고 있다."저는 진실로 우리 대총통께서 자기 한 몸을 바쳐 미래 중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신기원을 여시길 바라지, 과거 중국의 구태의연한 간웅처럼 낡은 파국을 보여주시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또 우리 대총통의 영예가 중국과 더불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지, 중국의 역사가 우리 대총통을 따라 함께 끊어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가슴을 두드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 최후의 충언을 올립니다." (-837-)

당시 량치차오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량치차오는 한동안 공중 여론의 비난 표적이 되었으며 오랜 친구조차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좡이 량치차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당시 분위기를 대표하고 있다."형님께서 수십 년 애국심을 간절하게 유지해오셨는데 결과적으로 이제 중국이 형님의 손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는 본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건 애석하세 여기지 않으셔도 되지만 국가가 망하는 것조차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시 이런 시각으로 량치차오를 바라보는 사람이 소수가 아니었다. (-960-)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정치"란 "결국 군벌 타파와 사회개선을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량치차오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친구와 인재를 더 많이 사귄 뒤 자신의 주위에서 그들을 단결시켜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그는 "늘 생각에 담아두고 한시도 잊지 않았던 건 바로 동지를 규합하는 일이었다" 라고 회고했다. (-1066-)

이어서 벌어진 일도 후스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1922년 3월 4일 량치차오는 베이징대학 철학사의 초청으로 싼위안 대강당에서 「후스의 『철학사 대강 』을 비평함」 이란 강연을 했다. 후스의 『중국 철학사 대강』은 1919년 2월 출간되었다. 사상사적 의의로 말하자면 이 책은 철학사와 경학사의 한계를 돌파한 획기적 저작이었다. 후스 개인의 입장에서 이 책은 사상 문학계에서 그의 입지를 확고하게 마련해줬다. (-1139-)

1928년 6월 10일 량치차오는 아직도 유럽여행 중이던 량쓰청에게 편지를 보내 "베이징의 정세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라고 알렸다. 이 때문에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 "칭화대학 교직 임용은 무산되었다""이 학교는 정당 사람들이 주도권을 다투는 장소라 오래지 않아 전체 구조를 모두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럼 네가 어지 발붙일 여지가 있겠느냐?" 그리고 그는 쓰청에게 둥베이[만주]로 갈 것을 권했다. (-1224-)

량치차오, 그는 1873년에 태어나 1929년 사망하였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량치차오와 쑨원을 핵심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는 이유, 량치차오가 추구하였던 중화민국의 미래를 , 『량치차오 평전』 에서 엿볼 수 있다. 그에게는 스승 망유웨이가 있었으며, 스승의 사상적 기반에 자신의 사상을 쌓아올리게 된다. 프로이트가 제자 구스타프 융을 두었지만, 구스타프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량치차오도 스승 캉유웨이와 다른 길을 걸어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존경심과 적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새시대에 이끌 사상적 철학의 기반을 나름대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량치차오는 순자 사상을 비판, 성토하였고, 맹자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기에 이루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피에 의한 군벌 정치가 아닌 맹자가 꿈꾸는 세상, 인민이 원하는 민국 정치를 만들어 나간다. 그는 꾸준히 저술하였으며, 신문을 세개 창간하면서, 주필로서 글을 쓰면서, 세상에 이바지하였다.두 아내와 아홉 자녀를 두었던 량치차오는 쑨원과 연합하고자 하였지만, 그 시대적 상황이 둘을 갈라놓게 된다. 『시무보』 주필이었던 량치차오는 웅변가였으며, 달변가이기도 했다.그런 와중에 세상은 그의 앞서가는 미래의 비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비판받았고, 비난을 몸으로 견디면서 중국에서 살아가게 된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사상, 금문경학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중국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무술변법이라 부르는 변법 자강운동,의화단 운동의 실패는 그가 생각한 철학이 그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집권하였던 청나라 말기의 망국의 나라는 결국 량치차오의 사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읽을 수 없었으며,그의 친구조차도 량치차오가 어떠한 중국을 원하는지 읽어내지 못하였다. 서태후의 권력에 밀리기 시작한 광시제는 량치차오를 중요하여 쓰고자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런 일은 량치차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또한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였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처럼, 난세엔 그 시대에 맞는 변화와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캉유웨이는 스스로 문필에 의존하는 백면서생이라 할 정도로,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그 시대가 원하는 사회적 실무에 능하지 못하였고, 주류였던 군벌 정치에 의해서 사회적 불이익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의 주역이 되면서, 량치차오가 추구하였던 사상적 배경은 어디에서 기인하였으며,그가 추하였던 맹자사상과 춘추에 근거한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 중국이 현재 노출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과 부작용에 재해서, 량치차오의 식견이 옳았음을 검증하고 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까지 책을 놓지 않았으며, 항상 저술에 힘써왔었다. 칼이 아닌 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끈을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그의 사상적 배경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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