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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팡 테리블 ㅣ 걷는사람 시인선 83
안지은 지음 / 걷는사람 / 2023년 2월
평점 :
정서와 서정
애인이 집으로 왔다.
나갈 땐 죽을 것처럼 울더니 살아서 돌아왔구나
네가 없는 빈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몸살이 났다.
몸에 살이 나면 원래 아픈 건가
우리는 하나의 소파를 나눠 쓰고
나는 자꾸만 등 쪽이 서늘해진다
가 닿을 수 없는
애인의 손과
어제 없는 미래
나는 그런 꽃의 충성심이 무섭고
살이 자꾸만 난다.
살이 몸이 된다는 건
소리에 목메는 것과 같고
애인은 소리 없이 웃는다.
한쪽이 정서면 다른 한쪽은 서정이다.
둘은 한집에 살고
소파는 이 집 중심에 있다. (-19-)
장례
편지를 불태우며 달리는 기차가 있다.당신은 틀린 맏춤법을 사랑하지. 나는 글씨를 거꾸로 쓰는 연습을 한다.내가 쓴 편지가 불타지 않는다.
장마가 오고 있어. 예감은 쉽게 예언으로 바뀐다. 모든 거짓말은 진실이 될 수 있다. 편지 봉투에 가면을 쓴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애초에 둘로 나뉜적이 없잖아.
당신과 나는 쉽게 우리가 된다. 유언장에 내 이름을 싸줘. 당신은 유리창에 엑스를 그어 놓고 구원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유리 조각을 나눠 먹는다. 서로의 이름에 구멍을 내며 돌림노래를 부른다.
청각이 통각으로 변한다. 기차는 곧 출발할 것이다. 기관실은 오른쪽에 있으나 당신은 왼쪽으로 들어간다. 돌림노래인 적 없다는 듯 노래가 끊긴다. 문을 닫기 전 찰나의 표정.
내게 당신의 표정이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맞다.
편지가 불타기 시작한다.
가명 위에 가명을 덧쓴다.
개에게는 개의 혀가 필요하듯. (-51-)
동심원
백야의 숲이다. 우리는 서로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텐트를 쳐야 할 때는 안다. 새의 지저귐이 멎을 때, 한 사람이 텐트를 치고서 대문처럼 멀뚱히 서 있다. 다른 사람은 장작더미를 세운다. 불은 붙이지 않는다. 우리는 안으로 돌아갈수 없다. 우리는 장작 주변에 둘러앉는다. 모두 말이 없다. 텐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손수건을 꺼내어 앉은 자들 주변을 서성거린다. 등을 보이건 한 사람이 빙그르르 몸을 돌린다. 원이 완성되고 있다. 수건은 여전히 한 사람의 손에 있다. 술래가 되는 건 이토록 쉽다. 한 사람이 재채기를 한다. 옆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사바에 송홧가루를 흩날리고 있다. 모두가 훌적인다. 수건을 쥔 그는 우리 주변을 하염없이 맴돈다. 하늘은 여전히 밝으므로 시간은 희미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한다. 눈과 코가 붉어진다.송홧가루가 우리를 타고 번진다. 적막이 흐르고 저마다 떠올리는 사람은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다. 술래의 손에 수건이 없다. 누군가의 등 뒤에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 누군가는 낌새를 모른다. 누군가의 뒤는 깜깜하다. 누군가는 무게를 모른다.맴도는 자는 계속 맴돈다. 수건은 손에 쥐면 가볍고 땅에 내려놓으면 무겁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맨땅에 익숙해진다. 수건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수건은 오직 하나다. 원이 깨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계속 맴돌아야 하는데 흐느낌 속에서 수건이 젖지 않는다. (-99-)
잊혀진 단어 『앙팡테리블(enfant terrible)』을 소환하고 있다.이 단어를 보면, 1990년대 후반 한국 K-리그를 축구를 휘날렸던 세 사람, 앙팡테리블 고종수, 테리우스 안정환, 라이언킹 이동국이 있다. 여기서 앙팡테리블(enfant terrible)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서운 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무언가 묵직함과 상처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인 안지은,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실체,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사랑에 대해서, 상처와 마주할 때,절망을 느낄 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견디면서 현재를 응시하는 것이다. 소위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보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 특유의 시상과 시적 표현력이 느껴진다. 완전하지 못한 세계,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쓰는 언어는 불완전할 수 밖에 없었다. 무게감이 느껴지고, 삶의 언저리에 삶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현재 불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 또한 내면 속 불안과 절망감, 완전하지 못한 그 무언가에 있는 건 아닌지 꼽씹어 볼 때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면서, 내 안의 마음을 채워 나가는 것, 숲에 나무가 없으면, 그것은 숲이 될 수 없다. 소위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려고 할 때, 채우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는 조급함이 어디서 기인하고 있는지 시인의 시적 표현속에서 답을 얻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 동심원을 따라서 맴도는 현상은 나와 무관하지 않는 나의 또다른 모습이 관찰 되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길 바라면서, 나를 지켜조는 것이 불편한 모순과 역설,이러한 모습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새로움을 갈구하는 또다른 원흉이 되고 있었다. 살아가고, 견디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시인은 왜 앙팡테리블, 무서운 아이라고 쓰고 있는지 꼽씹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