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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살아 볼게 - 그림 그리는 여자, 노래하는 남자의 생활공감 동거 이야기
이만수.감명진 지음 / 고유명사 / 2023년 1월
평점 :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원두를 갈고 있으면 진이도 졸린 눈을 비비며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아무 말도 없이 내 등에 제 등을 맞대고 앉은 채 자신도 가망히 멍때리고 있다. 진이는 내가 원두 가는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좋다고 한다. 진이와 등을 맞대고 커피를 갈다 보면 하루의 시작이 커피향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우리 주위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다. (-12-)
남자친구로서 처음 진이의 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허리를 바짝 세운 긴장된 자세로 아버님 어머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리였는데, 진이가 내 편을 들어준답시고 나 대신 부모님의 물음에 해맑게 대답하며 슴관처럼 내 귀를 만졌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고 얼리 때 내 귀를 그렇게 만져싸터니 이제야 내가 해방된 거 같네' 하시면서 후련해하셨다. (-28-)
나는 치킨을 좋아한다. 그래서 반려묘 이름도 '통닭'이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대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치킨을 잘 안 먹는다는 진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치킨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근거 없는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운동회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케이크보다 양념치킨을 더 자주 먹었다. 좋았던 기억이 그리움으로 버무려져 나의 고정관념이 된 것일까?(-64-)
갑자기 날씨가 쌀쌀쌍해졌다.진이와 함께 겨울 동안 입을 내복을 준비했다. 집에서 실내복으로 입으려고 내복 중에서도 가장 두툼하고 따뜻한 것으로 골랐다.
나는 건강한 체질이라 감기에 잘 걸리지 않지만,진이는 일 년에 두 세번은 감기에 거릴 정도로 추위에 약하다. 인터넷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내복을 주문해 본 건 처음이다. 문득 내가 아끼는 누군가의 내복 치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미소가 나왔다. 우리는 같은 내복을 입는 사이다. (-98-)
그림을 그리는 여자와 노래하는 남자가 서로 만나서, 서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다. 낯설고, 익숙해 하던 그 과정에 대해서, 결혼 이후의 삶을 긍정해야 햘 때이다. 삶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느끼고, 동거하고, 부부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삶은 그런 것이다. 서로 따스함을 느끼며, 같은 향을 보면서, 등을 기대는 사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여러가지 갈등에 대해서,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의 습관을 허용해 주는 사이다. 남녀가 만나서, 같이 산다는 것, 가만히 들어주는 것, 이 두가지에 대해서, 서로의 모습을 헤아려 주고,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에 있다.
공감, 그리고 이해, 이 두가지는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맞춰 나간다. 내복은 그래서, 서로 필요하다. 나에게 맞춰 다라고 요구하지 않고,내가 맞춰주는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준다는 것, 책 『내가 널 살아 볼게』은 청각과 시각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후각도 즐겁게 해주었다. 한 가정을 꾸리고, 서로 평화로운 것, 조용하고,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돌아보게 된다.
서로의 내복을 사다준다는 것, 치수를 안다는 것, 속옷을 사다준다는 것은 서로 친밀해지는 관계 그 자체이다. 이 두가지를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동거를 넘어서서,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서로의 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타인의 삶을 인정하면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헤아려 볼 수 있다. 삶에 있어서 색다른 활력이 어떤 것인지 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