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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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고문으로 아버지의 정자는 활동성을 잃었고, 병원에서는 임신불가 판정을 내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장터 주막에서 지리산에서 죽은 동지의 형을 만났다. 그는 한의사였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토로했더니 한의사가 약 한 재를 지어주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약을 먹고 내가 태어났다. 그날 이후 최씨 성을 가진 그 한의사는 우리 집안이 명의로 등극했다. 어쩌면 진짜 명의였을지도 모른다. 삼년 넘게 나를 괴롭힌 생리통을 약 한제로 멈춘 것도 그였다. (-27-)

언니들의 울음은 점처럼 멎지 않았다.동생 앞날 막은 작은 아버지의 죽음이 이리 애틋하다는 게 나는 신기했다. 사촌들이 대놓고 아버지에게 뭐라 한 적은 내가 아는 한 없었다. 하지만 사촌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묘한 장벽이 있었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입만 열면 옳은 말하는 잘 나가고 똑똑한 양반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고씨 집안의 자랑인 동시에 고씨 집안 몰락의 원흉인 것이다. (-90-)

군인들은 물러가기 전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한옥이든 상 놈의 초가집이든 불은 훨훨 잘도 붙어 순식간에 반내골은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불을 끄러 내려갈 수 없었다.군인들의 모습이 신작로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왓다. 연기에 휩싸인 마을 정자 옆,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 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큰 언니였다. (-128-)

노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내게 보여주려 가져온 모양이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 누르스름하게 변색된 사진 속에서 세 명의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섬진강 문턱 나루터였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직전까지 나도 그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아버지를 따라 읍내 나들이를 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하동댁 궁둥이를 두드린 날도 나는 입이 댓발이나 나온 채 이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194-)

마침내 재가 된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겨 나왔다. 아버지는 아직 따스했다. 누구의 차를 타고 왔는지 뒤늦게 나타난 작은 아버지가 앙상한 팔을 내밀었다. 그 팔에 아버지를 안겨주었다. 아버지의 온기가 작은 아버지의 팔을 타고 핏줄을 태울 터였다. 작은아버지가 풀썩 주저앉으며 아버지의 유골을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아홉살에 어긋난 형제가 칠십년 가까이 지나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촌들이 작은아버지를 둘러싸고 흐느끼며 눈물을 닦았다. 나는 유골의 온기가 근 칠십년 동안 화석처럼 굳은 작은 아버지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249-)

한 권의 책이 과거의 책과 연결될 때가 있다. 어떤 책이 시대적인 상황과 맞지 않아서, 빛이 바래졌다가 시대의 관용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읽혀질 수 있었던 케이스다. 2003년에 출간된 한수산의 저서 『까마귀』 가 2016년에 출간된 『군함도』 로 재출간된 케이스다.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된 『빨치산의 딸』 은 2022년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재출간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실제 빨치산의 딸 정지아의 삶이 반영되어 있었다.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 사회에 족쇄를 채우려는 의도로 , 대한민국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법,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그 법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반공주의를 부추기며 ,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우리 삶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실제로 『빨치산의 딸』 또한 출간될 당시 ,작가 정지아 또한 국가보안법에 연루된 바 있었다.

저자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소설에 반영한다. 빨갱이,빨치산으로 살아온 아빠의 죽음, 장례식을 서두에 등장하고 있었으며,자신의 삼촌, 작은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편한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됨으로서, 아버지는 반내골에서, 고씨 집안을 몰락시킨 원흉이 되었다. 물론 주인공 또한 빨치산의 딸로서,몰락한 고씨 집안의 딸이었을 뿐이다. 아빠와 화해할 수 없었고, 아빠를 용서할 수 없었으며,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빠의 죽음 또한 전봇대에 부딪쳐서 사망한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아빠가 살아생전 몰랐던 사실들, 가족이 몰락하게 된 이유를 아빠의 장례식이후의 시간이 반영되고 있었다. 빨치산이라는 한국 사회 특유의 사회적 형상이 주인공이 아빠처럼 살아가고 싶었던 이유였고, 아빠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이유였다. 작은 아버지의 불행도, 아빠의 불행도, 딸의 불행도,오롯히 아빠의 잘못이락도 생각한다. 무지하였고, 무식하였으며, 문맹이었던 그 시대의 상황이 만든 역사적 문제의식구조가 반내골 양반 고씨 부녀에게 그대로 투영될 수 있으며,여전히 우리 사회는 빨갱이,빨치산에 대한 족쇄,낙인이 숨어 있었다.그들이 숨죽이며 평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오롯이 책에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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