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동시에 일본 내에서 청나라와 조선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여론은 일본군을 신뢰하게 되었다. 조선을 지원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조선에서 일본의 권익을 취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울러 군사상 다양한 모순도 전승의 그늘에서 검증되지 않은 채 봉합되었다. (-33-)

"공격 정신은 충군 애국의 지성과 헌신순국의 대절에서 발현하는 정화다. 무기를 닦는 데 온 힘을 다하고, 교련을 통해 빛을 발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구가한다. 승패는 반드시 병력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잘 훈련되어 있고 또 공격 정신으로 다져진 군대는 늘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파할 수 있다." (-49-)

1935년에 접어들면서 두 파벌의 투쟁은 점차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통제파는 육군 상충부에 많았고, 불법적인 활동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해 국가 총동원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관료나 재계 사람들과도 연대하고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소련전보다 오히려 중국 제압에 비중을 두는 실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달리 황도파는 청년 장교가 많았고, 대부분 20대에서 30대로 지금처럼 부패한 일본은 천황의 뜻에 따르는 국가가 아니며,이상 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활동을 불사한다고 주장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같은 장군들이었는데,이 두 사람은 일이 있을 때마다 청년 장교들을 부추겼고, 그들의 순수무사 정신을 칭찬하며 부채질했다. 황도파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대해 격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145-)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219-)

"1941년 7월 28일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군이 미국으로부터 저처럼 즉각적으로 보복을 당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내부에서 이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일본에 대해 석유 수출을 중단하거나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사태는 루스벨트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이 전쟁을 각오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점에 관하여 우리는 예측을 잘못했던 셈입니다. 그 책임은 막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국책을 담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만큼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337-)

"일본은 그 무렵 미국을 알려고 하지 않앗습니다. 육군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일본을 알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뉴욕에 일본 라이브러리와 같은 코너를 만들었음에도 몇 명의 미국인이 다녀갔는지를 기록하는 일 밖에 하기 않았지요. 나는 진주만 공격 50주년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내는 작금의 정세를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은 저런 바보 같은 싸움을 했는지, 그것을 다시 물어야만 합니다." (-420-)

이때 병사들은 과달카날에서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까?

"우리 진지에서 앞쪽으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미군 진지가 있었습니다. 미군 병사는 우리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진지 위에 올라와 걸어다녔습니다. 우리는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쏘면 맞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쏘지 않았지요. 만약 이 병사를 쓰러뜨리면 몇 배의 폭격이 퍼부어져 우리는 전원 사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미군 병사와 정국 속에서 총격을 주고받게 되면 실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가 이동한 지점에 반드시 총탄이 날아오는 겁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오토모가 그 이유를 상세히 알게 된 것은 50년이나 지난 1991년이었다. (-507-)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 식량, 의약품, 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과달카날이나 동부 뉴기니에서 벌어진 전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군에는 이런 사상이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638-)

1944년 5월 2일, 공중에서 육해군이 한자리에 모인 통수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천황도 출석했다. 이 회의에서 육해군 통수부 대표가 현재의 전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천황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도 양 통수부는 마리아나를 공략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따를 것이고 그곳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이므로 미군도 경솔하게 손을 뻗치지는 않으리라는 경해에 뜻을 함께했다. 특히 참모차장 우시로쿠 준은 설령 마리아나 제도가 공격을 당한다 해도 제43사단을 파견하여 "적의 공략 기도를 분쇄할 수 있다" 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704-)

오시로는 자신의 책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부전선에서는 전투원과 일반 주민이 같은 동굴에 뒤섞여 있어린 아이들이 울고 부상자는 신음한다. 그러자 적에게 진지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울어대는 아이를 살해하거나 부상자를 독약으로 처치하는 잔혹한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패잔 심리까지 발동하여 약육강식의 극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장에서는 어린아이, 노인,부녀자, 부상자 등 약자부터 순서대로 희생되었다. 이처럼 인간성이 무너져 버린 현상이 전장의 진짜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798-)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은 옥음 방송을 통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법상의 문서에 조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영국, 중국이 함께 발표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의사 표시였다. 신징의 관동군총사령부에서는 참모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옥음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대본영으로부터 정전 명령이 있기까지는 "작전의 큰 틀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15일 오후 11시에 정전 명령이 떨어졌고, 관동군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와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등 최고 간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태도를 변경했다. (-887-)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도쿄전범재판에서 재판을 받은 것은 일본의 군벌이었는데 반론에 나선 28명의 A급 전범은 명확히 세 가지 유혀으로 나눌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은 극가의 선택으로 옳았다고 주장하는 피고가 첫번째 유형이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변호와 자신에 대한 변호를 동일시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은 모두 국가의 논리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의 정책과 자신의 신념 또는 정치 행동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며,자신의 역할에 한정해서만 반론을 펼쳤다. 이들은 국가를 변호하는 입장보다 개인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재판 자체에 전혀 관심 보이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담담하게 처신한 피고들이다. (-1001-)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왜 독일 쪽으로 기울었는가?이와 관련하여 쇼와 초기 참모본부에 근무했던 어느 장교는 "독일에 가면 자동적으로 독일 육군은 여성을 메이드(하녀)라는 명목으로 삼아 동거하게 한다. 그래서 독일에 파견된 군인은 친독파가 된다는 이야기가 메이지 시기부터 은밀하게 전해져온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독일 같은 시스템을 요구한 일본군 군인이 있었다고 하는데,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군인으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여성이 얼마든지 있다. 당신도 연애를 하면 되자 않겠는가"라는 야멸찬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암암리에 널리 알려져 있다. (1082-)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를 읽게 되면, 1900년초로 시간 여행을 떠나 제1차 세게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뉴스와 미디어를 통해,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정보와 전황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손에 쥐고자 하였던 일본의 야욕으 실체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왜 저자는 쇼와 육군이라고 말하는가,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군인이,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를 전쟁 거점으로 바꾼 뒤, 동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출발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으며,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일본 스스로 세계제 1위의 열강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다. 그건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닌, 도조 히데키라는 군인이, 일본을 군국주의화하였고, 군벌이 지배하는 일본, 정치군인이 일본의 정치, 경제,문화,전쟁을 주도하게 된다.관동군을 중심으로,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기에,군벌 일본 정치에 의한 전쟁, 쇼와육군이라 부르고 있다. 즉 군인이 전쟁을 주도하고, 전황을 이해하고, 군인이 전쟁의 흐름을 판단하기 전쟁전략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군인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태평양전쟁으로 파악하고자 , 1900년 초에 태어나 전쟁을 몸으로 경험한 1990년대 후반에 사망한 이들을 대상으로 500 명의 일본인을 구술하고, 증언록을 확보하면서, 만들어진 책이 『쇼와 육군』의 본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일본 사회를 이해하고, 한국 현대사회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가 일본군 관동군 장교 출신이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한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책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백선엽도 마찬가지다. 즉 한국 사회도 쇼와육군의 DNA를 물려받은 사회이며, 한국의 군대 운영방식, 병참기지 뿐만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대본영과, 참모본부의 실체, 내무상 도조 히데키가 도쿄 전범재판에서 , 사형당한 것까지, 그리고 , 일본이 임팔 작전에서 참패하고, 전황이 일본 주도에서, 미국 주도로 바뀌게 된 이유, 일본이 점령했던 사이판을 빼앗김으로 인해 일본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게 된 이유를 역사적인 증언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즉 메이지 시대(1867년 2월 13일부터 1912년 7월 30일까지) 에 태어난 일본인이 전쟁 지휘자가 되었고, 다이쇼 시대( 1912년 7월 30일~ 1926년 12월 25일까지)에 태어난 병사들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잔혹함과 가혹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파쇼 일본이 만든 태평양 전쟁이며,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전재을 종식할 수 없었다면, 일본은 영국, 소련, 독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에 대해 이해하지 않은 채, 진주만 습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 스스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할거라고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는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으로 전후 처리가 되었고, 28명의 A급 전범이 처형되었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