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 오늘의 시인 13인 앤솔러지 시집 - 교유서가 시인선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공광규 외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른 겨울이므로 사람들의 주머니에 햇빛 몇 잎 부족하다. 투명하게 얼어붙은 숲 자락과 마을. 하늘에서 새 한마리 떨어지는 소리.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고 겨울의 언어가 있으므로,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미 돌아보고 죽은 것들 사이로 끝없이 연기되었던 고백, 온종일 우리고 있던 쓴 차 茶. 함께 나눈 둥근 모음들, 구겨진 신발 뒤축과, 그 안에 가득하던 바람, 우리를 온종일 떠돌게 만들었던. 나는 이제 제때 차를 우려낼 줄 알고, 가느다란 햇빛 아래 가지런히 찻잔을 놓을 줄도 안다. 그리고 나는 창을 열고 서 있다. 몸과 마음에서 회색 연기를 뿜으며, 낯선 저녁 앞에 선 노인처럼. (-51-)

동생 동물

말을 막 시작한 다섯 살 동생에게 가르친 것

너의 방은 네 것이야

네가 잠근 문은 네 허락 없이 열리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뭄 닫을 때 손가락 조심하고

방을 나오면 언제나 사랑받을 거라는 사실

알아두렴, 세월은 너무나도 빨라

하얀 커튼 뒤에 숨어 엄마 얼굴 쳐다보고 있을 때

네가 까먹는 건 너의 시간만이 아이냐

하지만 동생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어린애는 짐승과 다름없다. (-38-)

동서울터미널

발 없는 손이 땅을 끌어 횡단보도 앞에 섭니다.

오늘은 자꾸 오늘만 일어나서 부탁해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터미널

동정은 멈추는 곳을 봅니다. 거저 달라고

빕니다 멈춰 선 자리마다 찾아오는 비둘기

보지 않습니다. 어떤 눈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죠 뒷거음질치는 기척이

떠나간 자리를 비둘기는 대신 바라봅니다.

9월입니다. 터미널 앞 포차는 여름의 끝을 꿰어

어묵을 끓입니다. 아직은 더워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목적지와 시간표

추석에는 모두 떠납니다. 어디로든 누구든

만나기 위해 비워야 할 집은 있고

비워둔 집이 멀어 달이 매달 혼자 하는 강강술래

고향의 집처럼 흡연부스는 다시 비워집니다.

목적지 대신 구름의 안부가 되기로 한 연기.

피어오르지만, 강제 퇴거를 거부하는 시위대 목소리엔

이제 목적지만 있습니다. 태워줄 버스도 없이

걸어서라면 갈 수 있을까요 외국인 노동자의

영상통화가 매일 향하는 곳,원의 바깥은

중심까지가 멀어 공전보단 차라리 자전이 낫겠습니다.

컨베이어 벨트, 윤달처럼 찾아오는 오차율 같이

돌다가 돌다가 캐리어를 굴리는 팔월 보름이

이탈한 채 질질 끌려가는 곳 동서울터미널

이어폰이 탑승한 귀가 계속 나를 출발합니다.

서로에게서 딱 얼굴만큼 딱 얼굴만큼 거리를 두고 앉아

뺨을 지나 코를 지나 다시 뺨.

잘못 매표한 승차권인 걸 알면서 고향은

떠날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팔월 보름은 구월이라서. (-143-)

열세명의 시인이 쓴 『몇 세기가 지나도 싱싱했다』 은 어떤 시점과 어떤 장소를 소환하고 있었다. 그 시점은 다섯살 이었으며, 어떤 장소는 서울 동서울터미널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까마득하게 기억하지 못하던 그 때 당시 내 마음은 흔들렸으며,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시기였다.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고집도 엄청 쌨던 그 때의 기억, 지금은 단순히 부모를 골탕먹이려고 하는 떼쟁이에 부과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대책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다섯 살 아이에게 너그러러워질 것을 말하고 있다. 단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주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내면 속 아이의 동심 속에 감춰진 저항과 고집스러움은 그 누구도 못 말리는 숨어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을 아는 이는 아이의 마음을 잘 활용할 것이며,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여,안정한 길로 안내가 가능하다. 어디로 가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만 안다면, 덜 힘들게 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아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공감의 힘을 얻게 되는 시였다.

어렸을 땐 청량리역, 지금은 강변에 있는 동서울터미널역이다. 서울을 자가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가고자 한다면, 이 두곳 중 하나를 거쳐가게 된다. 동서울터미널은 익숙한 곳이지만, 낯설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기계와 사람 간에 보이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들, 그 모습 속에서 ,인간은 나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내면에 숨겨진 다양한 군상을 엿볼 수가 있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모였다가 헤어진다. 단순히 머무렀다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가 아닌, 그 장소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한다면, 하나의 시가 탄생될 수 있는 단편적인 한 컷 한 컷이 남겨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