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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 거장은 어떻게 탄생되는가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월
평점 :
피카소는 1881년 10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말라가는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관문인 영국령 지브롤터에서 동쪽으로 100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안도시다. 이슬람과의 전쟁 과정에서 기독교의 최전선인 요새도시로 성장한 말라가는 현재 세계적인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13-)
이 시기 그야마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피카소로 하여금 20세 때 청색 시대를 열게 한 친구 카사헤마스가 자살한 것이다. 카사헤마스와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출품을 위해 함께 프랑스로 갔고 두 사람은 파리에서 집을 구해 함께 그림을 그렸다. 그곳에서 피카소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프랑스 여인 제르멩피소란 모델을 만난다. 제르맹은 스페인어를 할 수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그녀를 통해 프랑스어도 배울 겸, 세 명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33-)
피카소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다방면에 조예가 있었다. 1955년 그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 영화 <피카소의 신비>의 제작을 도왔고 1960년 장 콕토의 <오르페우스의 유언>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등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61-)
브라크와 피카소는 회화의 화면에서 사라져버린 현실감과 일상성을 복원시키기 위해 신문지, 상표, 털, 모래, 철사 등의 구하기 용이한 오브제들을 붙여 새로운 조형 효과를 나타냈다. 훗날 파피에 콜레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의해 현대적 콜라주로 발전한다. (-76-)
그가 이와 같이 파격적인 도전을 한 것은 당대 자연에서 본 색과 다른 색을 썼던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마티스는 자연에서 본 색이 아니라 그가 느낀 색을 표현했다. 당시 이 그림을 본 비평가들은 '야수'를 그렸다고 평했는데 이 말은 '야수파' 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91-)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은 <게르니카 Guernica> (1937), <시체구덩이 Le Charnier> (1945),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951) 이다.<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히틀러의 스페인의 게르니카 공격을 비탄하느 내용이고,<시체구덩이>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소재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 은 한국 사회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온 작품이다. 피카소가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고한국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106-)
1969년, 피카소 크레파스와 피카소 수채화 물감은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검찰은 이 제품을 생산하던 '삼중화학공업'의 사장을 공산당원인 피카소를 상품명에 썼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제품에 대한 광고도 중지시켰다. 피카소를 찬양하거나 그 이름을 상표, 광고 증에 사용하는 행위는 반공법 제4조 1항 '국외 공산 계열의 찬양 고무 동조'에 해당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제품의 상표는 결국 '피닉스' 로 변경되었다. (-126-)
2021년 5월부터 8월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의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개되었다. 프랑스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이 소장한 작품11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피카소의 회화 34점이 전시되었는데, 피카소미술관이 보유한 300여 점의 회화 중 10퍼센트 이상이 외부 전시에 나온 건 초유의 일로 알려졌다. (-127-)
"피카소가 어울린 여자는 학력 얼굴 몸매 취미 국적 직업 기혼 여부에 관계없다. 주변에서 만나는 여성이라면 닥치는 대로 자기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발견되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나이다. 올리비에 23세, 에바 26세, 올가 26세, 마리 17세, 도라 29세, 질로 21세, 재클린 27세로 ,모두 20대 이하의 여성들이다. (-133-)
마르는 <게르니카>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그녀가 피카소에서 암실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을 사진으로 찍는 데도 동의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실제로 특정한 잔학 행위를 묘사한 장면들은 피카소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마르의 영향으로 인식한다. (-152-)
로크의 초상화가 엄청나게 많은 이유는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심지어 로크의 성화에 못 이겨 피카소가 매일 제출해야만 한 숙제가 '로크 초상화'라는 얘기도 있다.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하자 로크는 피카소의 아이들인 클로드와 팔로마 피카소, 그리고 코클로바의 손자인 파블리토 피카소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했다. 파블리토는 화가 나서 표백제 한 병을 마셨는데 3개월 후 사망했다. (-164-)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Pablo Ruiz Picasso 는 1881. 10. 25. 스페인에서 태어나 1973. 4. 8.일 사망하였으며, 하루 다섯갑을 피울 정도로 상당한 골초였다.하지만 그는 익히 아흔이 된 나이까지 살았으며,장수하였다. 살아 생전 7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여성편력이 심한 예술가였다. 피카소와 함께 잠자리를 가진 여성으로 올리비에 23세, 에바 26세, 올가 26세, 마리 17세, 도라 29세, 질로 21세, 재클린 27세 가 있었으며, 여성이 주도적으로 피카소와 함께 잠자리르 가지고 있었으며, 피카소는 스스로 태양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카사노바가 아니 예술의 영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피카소는 입체파 (큐비즘)의 원조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입체파의 원조는 피카소가 아닌 브라크였으며, 그말이 시작된 것은 마티스였다. 브라크가 입체파의 원조이지만, 입체파를 널리 알린 것은 피카소의 공이 크다. 피카소의 그림은 상당히 왜곡되었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천재 화가로 부르고 있었다. 생전 5만 점의 예술작품을 남겨서,생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며, 그가 남긴 예술작품 5만점은 기네스북에 오른바 있다. 피카소의 삶은 반고흐의 삶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피카소는 절친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인해,그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서, 청색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피카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다섯 창녀들을 그려낸 <아비뇽의 처녀들>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피카소와 한국의 연결고리다. 피카소는 반전 그림 3점 <게르니카 Guernica> (1937), <시체구덩이 Le Charnier> (1945),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1951) 은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그중 한국전쟁에서 모티브를 얻은 <한국에서의 학살> 으로 인해, 그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반공법에 저촉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피카소는 위대한 화가이면서, 한국인이 언급하기에는 불결한 존재이기도 하였다. 나치의 악인종 학살 ,제노사이드를 <시체구덩이 Le Charnier> 에 녹여내기도 하였다.그만큼 피카소는 90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끝 무렵 1년 동안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려낼 정도로, 다작의 그림을 그린 바 있으며, 그가 살았던 시기에, 반 고흐, 고갱, 세잔과 함께 하였다.